뉴노멀 시대의 코이노니아
데살로니가전서 3:1-4
세상에서 만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 열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뉴노멀(New Normal) 시대의 코이노니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설교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세미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발견하고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로써 우리 자유교회가 대면 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예배로 전환한 지 꼭 1년째 되는 주일입니다. 처음 대면 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예배로 전환할 때만 해도 이 사태가 이렇게 오래 갈 것이라고는 1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길어도 여름쯤에는 대면 예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여름이 되어도 코비드 팬데믹 상황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갈수록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1년이 지나도록 우리 교회는 여전히 온라인예배로 모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제는 주변의 여러 교회가 대면 예배를 시작하고 있지만, 지극히 제한적으로 겨우 간신히 주일예배만 드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1년 이상 계속되는 코비드-19 팬데믹으로 인해 대부분 사람이 신체적 위기와 함께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고통까지 겪는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팬데믹으로 인한 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심각한 위기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전염병 전문가들이 예상하길 코로나를 완전히 종식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독감처럼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인류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제 인류는 뉴노멀(New Normal)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교회 역시 뉴노멀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교회 역시 변화된 상황에 맞게 새로운 시대의 교회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부터 사도행전의 말씀을 가지고 아침 묵상을 하는 것과 주일마다 데살로나가 전서의 말씀을 가지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살펴보는 것 역시 앞으로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고 찾기 위함입니다.
계속되는 팬데믹으로 인해 교회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이 지금 상황이 교회의 심각한 위기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위기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고 해결해 나갈 것인지 찾는 것은, 지금 교회가 겪는 위기를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그 대응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면 예배가 제한된 지금 이 상황을 교회 생존의 위기나 재정의 위기 정도로만 여긴다면 무리하게 대면 예배와 이전의 교회 사역을 강행하려고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교회의 생존만을 위한 대처는 우리가 겪은 지난 1년의 시련 가운데서 아무런 의미나 교훈도 얻지 못하고 그저 쓸모없는 시간으로 낭비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뉴노멀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변화의 시기입니다. 모든 분야에 걸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교회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라는 생존의 문제에만 매달리게 되면 교회는 다가올 뉴노멀 시대를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이 위기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이전에 먼저 교회가 생존해야 하는 존재 이유에 관해 질문하고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있어야만 새로운 뉴노멀 시대에도 교회는 여전히 살아있고 제대로 움직이며 작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뉴노멀 시대의 교회는 어떻게 하든 교회의 생존을 연장하는 데만 초점을 두기보다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교회의 본질에 기초하여 뉴노멀 시대에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임기응변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근본적인 변화만이 새로운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게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도 건물로서의 교회일 것입니다. 교회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 여기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이 십자가 장식을 한 건물과 그 건물에 교회라고 여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교회에 대한 이런 생각이 교회가 코비드 팬데믹 상황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되는 코비드 팬데믹으로 인해 교회 건물에 모이는 것이 규제되고 제한되는 상황에서 건물이 교회라는 생각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코비드 팬데믹이 잠잠해지고 예전처럼 건물에 함께 모일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이제는 건물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또다시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은 팬데믹으로 인해 전통적인 대면 예배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비록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신자들의 공동체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기에 교회 자체가 기능을 멈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교회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본질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한글 성경이 교회라고 번역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만 121번이 사용되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그리스어로 불러냄을 받은 자 또는 회중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지상 교회의 기원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막상 교회라는 표현을 마태복음에서 딱 두 번만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통해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마16: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눅9: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 공생애 사역의 초점은 교회를 세우는 데 있기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일에 맞춰져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는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세상에 교회를 세워가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확장해 간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확장하는 것을 세상과는 구별된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거룩한 교회 건물을 짓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몰라서 저지른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건물을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려는 지극히 고의적이며 의도적인 왜곡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내 삶과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며 동시에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신앙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를 위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과 데살로니가 교회는 극심한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었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도망치듯 급하게 데살로니가 도시를 떠나왔기에 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과 관리들의 극심한 핍박과 박해로 인해 교회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시 찾아가려고 했지만, 번번이 여러 가지 방해로 인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살전2:18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고, 특히 나 바울은 한두 번 가려고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데살로니가 도시를 방문할 수 없게 되자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내고는 자신은 실루아노와 함께 고린도로 향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목적에 대해 편지하기를 데살로니가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저들의 믿음을 격려하여 저들이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환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살전3:2-3 우리의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여러분에게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가 여러분을 굳건하게 하고, 여러분의 믿음을 격려하여, 아무도 이러한 여러 가지 환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기록한 것처럼 성도와 성도의 관계는 서로의 믿음을 굳건하도록 도와주며 격려하고 용기를 주어 세상을 살면서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 공동체가 반드시 이루어 가야 하는 성도의 진정한 교제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교인들의 교제는 바울 일행과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준 교제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교제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대부분이 상대방의 믿음을 세워주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도 간에 교제를 나눈다고는 하지만 막상 교인들 대부분의 관심은 ‘저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정해 주면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거나 좋게 여기지 않으면 거리를 두며 자신도 상대방에게 비호감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성도 간의 관계에서도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 보니 상대방을 세워주고 격려하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대신에 상대에 관한 불충분하고 왜곡된 정보에 휘둘려서는 편견과 선입견 사로잡혀 다른 교인을 단정하거나 판단하려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뒷담화가 무성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마음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는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합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교제를 하면 가장 편안하고 위안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비슷한 수준의 사람끼리 모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와 교제를 통해 위로를 얻으려고 합니다. 분명 세상을 살며 이런 교제를 통해 위로를 받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의 방식을 교회에서도 똑같이 적용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세상에서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교제하려고 합니다. 자신이랑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이고, 자신이랑 가장 비슷한 사람에게서 위로와 안도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과연 이것을 성경이 가르치는 성도의 교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가 아니라 파벌이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훈련하고 배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도의 교제가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성도의 교제는 서로의 믿음을 굳건히 해주고 믿음을 격려해 주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어려운 상황 중에도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이유는 오로지 저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저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저들이 겪는 환란 가운데서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관심은 오로지 저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에게 가져야 하는 관심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온갖 세상의 유혹과 핍박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는 힘은 오로지 같은 길을 함께 가는 교회 공동체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도시에서 극심한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를 통해 전해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소식을 듣고는 큰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들은 소식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 중에도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키며 교회를 지켜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전3: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바울 일행이 겪는 환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애써야 합니까? 내가 믿음으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때 나와 함께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도 믿음으로 바르게 살게 하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말 속담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급하다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면 반드시 실수하게 되니까 급할수록 꼼꼼히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행동하고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분명 교회의 심각한 위기 상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의 위기만 겨우 넘기려는 꼼수나 편법으로는 교회가 더 큰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위기일수록 교회의 기본과 코이노니아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뉴노멀 시대에서도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예수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