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성도의 거룩한 삶인가?
데살로니가전서 4:3-8
세상에서 만드는 하나님 나라 시리즈 설교 열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무엇이 성도의 거룩한 삶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이전이나 믿은 이후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런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이전의 삶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한 이후의 삶은 가치관이나 삶을 사는 태도나 방식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전, 우리가 인생을 사는 방식은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남들에게 돋보일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인정받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더 많은 쾌락을 즐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한 다음의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가? 어떤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인가?”로 바뀌어야 합니다.
며칠 전 어떤 분이 저를 찾아와서는 무명으로 $6,500불을 헌금하셨습니다. 헌금하신 분이 부자라서 그렇게 큰돈을 헌금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당장 재정이 부족한 것도 아니기에 극구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왜 이런 결정을 하셨는지 설명해 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는 감동이 되어 더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서 이번 주 교회 재정에 넣었습니다.
그분의 헌금을 받고는 코비드 팬데믹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분이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얼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이분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인생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자신을 복되게 한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하며 사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 큰돈을 저에게 내밀면서 아까워하는 표정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할 수 있어 너무 감사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남들에게 돋보일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인정받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더 많은 쾌락을 즐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 이렇게 물으며 살아서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인생의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것이 있다면 뜻대로 노력한 대로 기대한 대로 되지 않는 인생으로 인해 지독한 자기 연민에 빠져 불행하게 인생을 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헬렌 켈러)
뜻대로 노력한 대로 기대한 대로 되지 않는 인생 때문에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살고 있다면 당장 자기중심의 인생에서 하나님 중심의 인생으로 그 가치와 기준을 바꿔야 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으로 바뀔 때 나만 위해 살려고 할 때는 절대로 알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했던 신비하고 놀라운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거룩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 또한 거룩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칩니다.
살전4:3a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많은 교인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고민합니다. 많은 교인이 도대체 자기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고민하는 하나님의 뜻은 주로 이런 것입니다.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떤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디로 이사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떤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떤 집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얼핏 보기에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 같이 보여 대단히 신실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매사에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뜻을 묻는 믿음이기보다는 하나님을 한낱 미래를 점치는 점쟁이쯤으로 전락시키는 불순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른다고 변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모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하든 그 선택과 결정을 통해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내린 선택과 결정으로 거룩한 삶을 살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선택과 결정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이나 결정이 당장 우리에게 아무리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 해도 그 선택과 결정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지 않는 선택과 결정은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내가 내린 선택과 결정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결단코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의 거룩은 데살로니가 교회에만 주신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도의 거룩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길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거룩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면 신약성경의 말씀은 기독교인이 거룩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레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이처럼 거룩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인생을 사는 삶의 태도이며 방식이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거룩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삶의 태도와 방식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기독교인은 거룩함을 잊어버린 세상을 향해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가르쳐 주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젠 기독교인을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을 보여주는 교인들도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교인들조차도 굳이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교인들도 부지기수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너무나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거룩을 심각할 정도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룩에 대한 오해는 오늘날 목사나 교인들을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신앙인으로 만들고 있는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일까요? 너무나 많은 목사와 교인이 거룩을 ‘엄근진’쯤으로 생각합니다. 엄근진은 엄격, 근엄, 진지의 앞글자를 딴 신조어입니다.(홀리 보이스) 매사에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오직 성경만 읽으며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고 때를 따라 금식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거룩한 삶일까요?
복음서를 보면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 지켰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이들은 율법이 규정한 대로 안식일을 정확하고 지킵니다. 심지어 율법이 정한 안식일 규정보다 더 많은 안식일 규정을 만들어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텃밭에서 거둔 채소까지도 정확하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마다 기도하고 일주일에 세 번씩 금식합니다. 세리와 죄인과 같은 사람들하고는 절대로 함께 어울리지도 식사도 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매번 손을 씻습니다. 율법을 너무나 많이 연구하고 잘 알기에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랍비라 칭함을 받고 길거리를 다니면 많은 사람에게서 인사를 받습니다.
반면에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율법에 대해 말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말씀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탕자의 비유, 강도당한 사람의 비유,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그물의 비유, 진주 장사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등 주로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눈에 박힌 들보의 비유와 같이 과장된 농담으로 비유하시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꺼리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좋아해서 먹보요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듣습니다. 예수님 주변은 아이들과 여인들이 쫓아다녀서 늘 시끄럽고 번잡스럽습니다. 마치 시장터 같습니다. 게다가 데리고 다니는 제자들은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밀이삭을 까먹다 바리새인들에게 책망을 받습니다.
눅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거룩한 성전 뜰에서는 거룩한 제물을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고는 채찍을 휘두르며 저들을 내쫓습니다. 많은 유대인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와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 욕하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저주도 합니다. 심지어 헤롯왕을 향해서도 ‘저 여우’라며 왕을 모욕하고 비웃습니다.
과연 바리새인과 예수님 중 누가 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일까요? 물론 교인들 가운데 누구도 예수님보다 바리새인들이 더 거룩하다고 여기는 교인들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리새인과 예수님이란 표현을 빼고 바리새인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만 가지고 설명한다면 아마도 교인들 대부분은 바리새인의 모습을 더 거룩한 삶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인들 대부분이 생각하는 거룩의 기준에 따른다면 예수님이 보여준 모습보다는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모습이 훨씬 더 거룩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정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람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거룩함에 대해 우리가 너무나 잘못 생각하며 신앙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이 ‘거룩’이란 말만 들어도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룩함’을 보통 사람과는 거리가 먼 특별한 사람들만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룩함은 우리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특별한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정상적인 삶입니까?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필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착각하기를 욕심대로 사는 것이 본능적이며 정상적인 삶이고 욕심을 다스리며 사는 것이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우리가 욕심을 다스리며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실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욕심대로 사는 것이 비정상적인 삶이고, 욕심을 다스리며 사는 것이 정상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욕심대로 살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심판과 죽음입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거룩함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음란을 버리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몸을 대하고 자신의 아내를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적 쾌락을 위해 이웃을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살전4:3b-6a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금욕하며 사는 것을 거룩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음란하지 않은 것을 거룩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룩에 대한 매우 중요한 성경의 가르침이며 원리입니다. 금욕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음란하지 않은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금식한다고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으려는 마음이 훨씬 더 거룩한 것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마실 수 있다면 이것이 훨씬 더 거룩한 일이 됩니다. 동성애자를 멀리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진짜 거룩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룩을 너무 거창하고 대단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을 너무 대단하고 어려운 것으로 여기니까 오히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루기 힘든 대단하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룩한 삶이 무엇입니까? 내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내 것 아닌 것에 욕심내지 않고 지금 내게 주어진 것에 자족하고 만족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삶을 통해 존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