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종말을 준비하는 방법
데살로니가전서 5:1-6
세상에서 만드는 하나님 나라 열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피할 수 없는 종말을 준비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합니다.
구약성경이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반복하여 강조하였다면 신약성경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무려 318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던 신앙공동체였습니다.
살전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예수님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나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 여행을 통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었던 대표적인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강림을 기독교 신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믿음은 종말론으로 발전하였으며 임박한 종말론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세상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종말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세상 나라의 종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삶이 끝나는 인생의 종말인 죽음입니다. 물론 어느 것이 우리 인생에서 먼저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종말이든 죽음이든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을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주의 날은 불의하고 타락한 세상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는 날입니다. 동시에 불의하고 타락한 세상의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왔던 사람들을 구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불의한 자에게는 저주의 날이지만 의로운 자에게는 축복의 날인 것입니다.
살전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주의 날은 세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에 대한 심판과 멸망을 의미하는 종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주의 날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하는 날입니다.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종말과 함께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메타포입니다.
인간의 죽음 역시 주의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죽음에 대해 사라지는 것이나 소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는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즉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시작할 때 자는 자들이 깨어나서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세상의 종말이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날과 관련하여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때와 시기에 관한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당장 일어날 일로 여겼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는 세상 끝날이 가까웠다며 음란과 색욕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또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들에게 빌어먹고 살려는 교인들도 생겨났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종말론 신앙에 빠지게 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종말의 때와 시기에 관한 지나친 관심과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사이비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특정한 날짜나 특별한 조건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해서는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주의 날에 대해서는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가르쳤고 데살로니가 교회도 이것에 대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르쳤던 주의 날은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도둑같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도둑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오듯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주의 날이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살전5:1-2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어느 날 어느 때라는 것을 알면 도둑맞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시기를 모르니까 도둑을 맞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통해 주의 날 즉 종말의 때와 시기에 관해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종말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종말의 때와 시기에 매달리며 집착하는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종말의 때와 시기를 알 수 없다고 해서 종말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생각입니다. 데살로니가 도시에는 주의 날 즉 종말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인생은 예상하지 못한 날에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예상치 못한 날에 있을 주님의 재림으로 불의하고 타락한 세상 나라도 반드시 종말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살전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바울은 종말의 때와 시기에 대해서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 종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른 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물론 요즘은 의학의 발달로 거의 정확한 출산 예정일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임신한 여자가 언제 해산하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다만 임신한 여자는 때가 되면 반드시 해산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의 편지에서 보듯이 데살로니가 도시에는 주의 날과 관련하여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의 날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있었고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여겼던 데살로니가 도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말에 관한 서로 다른 두 관점은 서로 다른 삶의 태도와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주의 날이 있을 것을 알고 늘 깨어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도적 같이 임하는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주의 날을 무시하고 외면한 사람들에게는 임신한 여자에게는 반드시 해산의 고통이 찾아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살전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많은 사람이 종말이라고 하면 또는 죽음이라고 하면 두렵고 무서운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말이나 죽음을 깊이 생각하고 장차 있을 종말이나 죽음을 대비하려고 하지 않고 회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렵고 무섭다고 회피하고 외면하고 멀리한다고 종말이나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종말이나 죽음에 대해서 미리 준비하거나 준비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종말이나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 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지든지 분명한 것은 임신한 여자에게는 반드시 해산의 때가 이르는 것처럼 종말이나 죽음의 때도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거나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종말이든 죽음이든 이미 분명하게 예고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종말이나 죽음이 두렵고 무서워 회피하거나 애써 외면하며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종말이나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어떻게 해야 종말을 잘 준비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종말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님의 날이 이를 때에 멸망을 피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놀라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밤에 속한 사람과 낮에 속한 사람이라고 구분하였습니다. 낮과 밤이 공존하듯이 낮에 속한 사람과 밤에 속한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낮에 속한 사람이 있고, 밤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살전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밤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개인의 죽음이든 세상의 끝이든 마지막 날이 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됩니다. 반면에 낮에 속한 사람은 죽음이든 세상의 종말이든 어느 것이 먼저 찾아와도 놀라지 않습니다. 이미 언제라도 주의 날이 닥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빛과 어둠, 낮과 밤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분하고 나타내는 성경의 대표적인 메타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암흑과 같은 밤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흑과 같은 세상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고 마침내 세상에 빛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빛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요? 완전히 빛 가운데 있습니까? 아니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어둠이 물러가고 사라지는 날이 온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날은 도적같이 올 것이니 깨어 있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살전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빛와 어둠, 낮과 밤이 공존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와 공의와 공평이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하는 세상 나라가 공존하는 현실을 사는 것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며 상황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는 데에는 세상 방식과 하나님 방식이 공존합니다.
세상 방식은 내게 유리한 정의와 내 이익을 우선하며 사는 것이라면 하나님 방식은 모두의 공의와 공평을 위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빛과 어둠, 낮과 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공존하고 있는 이 세상을 사는 데에는 어떤 방식이 더 유리할까요? 세상의 방식일까요? 하나님의 방식일까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이 세상을 사는 데 더 유리한 방식은 세상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방식으로 사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한다면 누구나 하나님 방식으로 살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엄연한 현실은 하나님 방식보다 세상 방식대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하는 교회조차도 하나님 방식보다는 세상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이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유지되는 교회가 과연 이전보다 더 나은 교회, 더 좋은 교회가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방식이 세상을 사는 효과적인 방법이며 처세술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하는 곳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엄마 배 속의 아이가 장차 오랫동안 살아야 할 곳은 엄마의 자궁이 아니라 세상인 것처럼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엄마 배 속의 태아가 엄마의 자궁에서 세상을 살아야 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종말이나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이고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지금 이 세상에서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큰 출세와 성공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는지 아니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역설적이지만 지금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답게 살게 하고 존귀하게 살게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운명을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종말과 죽음이라는 운명이 멸망의 저주가 되게 하거나 반대로 영원한 축복이 되게 하는 선택과 결정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빛과 어둠, 낮과 밤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빛의 아들로 낮의 아들로 살 수 있습니까? 어둠이 밤이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빛의 자녀로 낮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라기는 종말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 멸망과 저주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얻는 기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