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
욥기 1:1
오늘부터는 앞으로 얼마가 될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욥기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욥기는 코비드 팬데믹으로 온라인 예배를 시작하면서 줌으로 성경공부를 했던 말씀입니다. 하지만 처음 줌으로 성경공부하는 것이 익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어려운 성경을 선택해서는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그만 중간에 포기하다시피 서둘러 끝내고 말았습니다.
중도에 포기한 욥기의 말씀을 다시 설교하기로 결심한 데에는 지금이야말로 욥기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생각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자기 계획한 대로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사람은 욥기를 아무리 읽어도 욥기가 전하는 메시지를 발견하거나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비로서 욥기의 말씀이 절실하게 와 닿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코비드 팬데믹 사태는 아직도 언제나 되어야 이 상황이 끝이 날지 모르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지내고 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사람에게 확산되었는지 밝혀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쩌면 코비디 팬데믹이 끝날 때까지도 이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단지 코로나19 바이러스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면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건이나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에 신경쓰지 않고 사는데도 평생을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늘 건강에 신경을 쓰고 사는데도 온갖 병을 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도 많습니다. 사람들중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물론이고 그 부모는 평생 말못하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이런 일들이 왜 생겨나는지를 아십니까?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소경으로 태어났습니까?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이것은 신체의 질병이나 장애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요9:2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물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이스라엘 종교 문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심지어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종교 문화에서 어떤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불치의 병에 걸리면 이것은 반드시 누구의 죄나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믿음입니다. 도대체 누구의 죄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이것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현재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이나 고난에는 반드시 타당한 원인과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인류의 공통된 생각이며 믿음입니다. 물론 이것은 여전히 지금도 우리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이런 믿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자성어로 사필귀정(유교)이나 인과응보(불교), 상선벌악(천주교 교리)이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일에는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원인이 있다는 인과응보는 가장 대표적인 불교의 신앙입니다. 불교는 착한 업을 지으면 좋은 결과가 따르고, 나쁜 업을 지으면 악한 결과를 불러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착한 일을 함에도 불행한 일이 생기면 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설명합니까?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전생에 지은 모든 악한 업보를 소멸하여 윤회의 지옥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 불교의 구원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도 인과응보나 업보신앙과 대단히 비슷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심은 대로 거둘것이라는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바울의 주장은 불교의 인과응보와 대단히 비슷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6: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은 불교나 기독교만이 아닌 거의 모든 인류문화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믿음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램이고 믿음이지 실제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좋은 일을 했음에도 나쁜 결과가 있을 수 있고, 나쁜 일을 했음에도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욥기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타당한 원인이 있다고 확고하게 믿는 이들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대단히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성경입니다. 고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어떤 사람이 복을 받으면복을 받을 만한 선한 일을 했기 때문이고, 고통이나 고난을 겪으면 고통 받을 악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욥기는 이러한 믿음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물론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당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욥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는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기는 이러한 본래의 기록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설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욥기가 전하려고 하는 본래의 메시지와는 정반대로 해석되고 설교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왜곡은 신실한 욥이 극심한 고난 중에도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아 갑절의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기의 말씀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하는 엉터리 해석입니다.
욥은 도무지 그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으로 인해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묻고 따졌던 사람입니다. 욥이란 이름의 뜻은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은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입니다. 욥의 이름 자체가 모두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따지고 묻는 것입니다. 욥의 존재 자체가 자신이 억울한 고난을 겪을 때 도무지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을 애타는 외침이며 저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기를 본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르게 엉터리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욥기가 진짜 전하려고 하는 욥기의 본론은 제대로 읽지 않고 욥기 앞과 뒤 부분에 나온 이야기로만 욥기를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총 42장으로 되어있는 욥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론 부분인 욥기 1장과 2장의 말씀과 본론 부분인 3장부터 41장까지 말씀과 결론 부분인 42장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교인들은 욥기 의 본론은 다 생략해버리고 서론과 결론 말씀만 가지고 욥기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욥기의 핵심 메시지는 본론에 있는데 정작 본론은 생략하고 서론과 결론의 말씀만 가지고 욥의 고난을 이해하고 해석하니까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엉터리 해석과 적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해석과 적용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매우 이상한 해석과 적용이 되고 맙니다.
욥기는 신구약을 전체를 통틀어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성격이 가장 강한 성경입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욥이란 사람은 실존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전형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욥기를 거룩한 문학이라고 해서 성문서라고 합니다.
욥이 실존했던 인물이던 가상의 전형적인 인물이든 이것이 욥기가 주는 메시지의 의미를 가볍게 하거나 훼손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실존인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인생의 고난으로 인해 절규하였던 사람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욥기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됩니다.
욥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욥기의 시작은 마치 옛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옛날 옛적에 ~이 살고 있었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욥기가 기록한 우스 땅이 어디에 있는 지역인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욥이면 욥이지,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도 특이합니다.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욥기를 기록한 저자는 욥이 살던 시대, 욥이 살던 지역 그리고 욥이란 인물이 대한 역사적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본질적이지 않는 부차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기는 욥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겪는 고난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을 줍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변할 때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옛 질서가 무너져 내릴 때, 든든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흔들릴 때, 상식이 더는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욥기를 기록하고 읽었던 당시 시대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 논리로는 해명되지 않는 세상이 그들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욥기는 율법의 가르침이 부질없어 보이는 현실, 성전 신앙이 더는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현실,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인생의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 말 가운데 이열치열(以熱治熱), 이한치한(以寒治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은 열로 다스리고 차가움은 차가움으로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슬픔의 감정 또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들음으로 슬픔을 다스립니다.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인생의 고난이나 역경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욥기를 읽다 보면 연민과 비슷한 감정이 일고, 어느 사이에 자기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욥기를 함께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반드시 염두에 두고 주의해서 할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욥기를 읽고 해석하고 적용할 때 함부로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욥이 겪는 고난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은 땅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시련이 부조리하다는 것입니다. 욥이 지금껏 가졌던 신앙으로는 그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그는 거듭거듭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벌을 받고, 선한 이들이 상을 받는 것이 그가 의지해 온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욥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도무지 자신에게 적용할 수 없는 상선벌악의 신앙을 가지고 욥을 위로한다고 찾아온 세 친구가 욥을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불행을 겪는 이들을 보면 위로한답시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기는 욥기를 읽는 모든 이들에게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욥기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인생에 대한 교훈은 인생이란 부조리해 보이는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인생에서 모두에게 혹은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답은 없습니다. 인생에는 그리고 신앙에는 정답이란게 없기에 끊임없이 자기만의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고 신앙입니다.
‘당연의 세계’가 속절없이 무너질 때 세상은 불안정해집니다. 사람은 크게 흔들립니다. 그런데도 인생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욥에게 닥쳐온 고난의 이유를 찾는 것에만 초점을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이 우리에겐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욥기를 읽는다는 것은 세상에 던져진 유한한 존재로서의 우리 삶의 부조리한 실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손쉬운 해답을 구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절규하며 기도해 보지 않았던 사람은 절대로 욥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인생의 고통 앞에서 섣불리 쿨한 척, 신실한 척, 괜찮은 척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태도는 절대로 우리의 삶과 신앙을 성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욥처럼 인생의 부조리함 앞에서 도대체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처절하고 원망하고 절규하며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인생의 부조리함을 뛰어넘는 초월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