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기 1:1-12
욥기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함께 읽고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세미하고 부드러운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하고 생동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욥기의 시작은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욥기가 기록한 우스라는 땅은 지금까지도 그곳이 어디인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애가 4장 21절에 우스라는 지역이 딱 한 번 더 나오지만 이것 역시 정확한 지역은 아닙니다.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스는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나오는 엠마오처럼 가상의 지역일 가능성이 큽니다. 우스가 실제 존재했던 지역이든 가상의 지역이든 욥기에서 우스라는 지역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욥기는 우스라는 지역보다는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라는 말씀이 참으로 오묘합니다.
지난주에도 설명을 했지만, 욥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가?’입니다. 욥기는 1장 1절에 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욥기를 통해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를 욥이라는 이름을 통해 모두 밝히고 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욥에 대한 소개입니다. 욥기는 욥이라 불리는 사람에 대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욥과 같은 칭찬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욥기가 소개하고 있는 욥은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욥1:1b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방주를 만들어 하나님의 홍수 심판에도 구원받은 당대의 의인 노아도 욥과 같은 칭찬을 듣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장차 세상에 오실 예수님을 나타내는 예표라고 하는 요셉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이스라에 최고의 왕이라 여기는 다윗도 욥과 같은 칭찬은 받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그 어떤 인물도 욥과 같이 최상급의 칭찬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완벽하였던 욥에게는 아들이 일곱이며 딸이 셋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일곱 아들은 가장 이상적인 자녀의 축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일곱 아들에다 세 딸을 더 두었다고 했습니다. 고대 중동의 문화에서 일곱 아들에 세 딸은 가장 완벽한 자녀의 복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그야말로 욥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완벽한 자녀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욥1:2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욥이 누린 축복은 자녀의 복만이 아니었습니다. 욥기는 그가 가진 재산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욥은 양이 7천 마리, 낙타가 3천 마리, 소가 5백 쌍, 암나귀 5백 마리에다 수많은 종도 소유했습니다. 욥은 동방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아주 으뜸가는 부자였습니다.
욥1:3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욥기가 욥의 소유물에 대해 그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실제 그의 재산을 나열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실제 욥이 가진 재산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렇게 딱 떨어지는 숫자로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욥의 재산에 대한 욥기의 기록은 그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만한 완벽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는 대부분 수학으로서의 숫자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에서 7은 하늘의 완전수인 3(성부, 성자, 성령)과 땅의 완전수(동서남북 4방위)인 4가 더한 숫자로 하나님의 창조를 나타내는 숫자(일주일)입니다. 10은 하나님의 창조와 하늘의 완전수인 3인 합쳐진 숫자로 하늘과 땅 사이에 부족할 것이 없는 완전한 풍요로움을 뜻합니다.
욥은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합쳐 10명의 자식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완벽한 자녀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욥은 자식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는 완벽한 물질의 복도 받는 사람입니다. 양이 7천마리에 낙타가 3천 마리 총 1만 마리였으며, 소가 5백쌍에 암나귀가 5백마리 총 천 마리였습니다. 이것은 욥이 누린 물질의 축복이 완벽했음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이처럼 욥기가 소개하는 욥은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만 완벽했던 것이 아니라 완벽한 자녀의 복과 물질의 복까지 누리는 그아먈로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욥기는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은 동방 사람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라.”는 욥기의 말씀입니다.
(개역개정) 욥1:3b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새번역) 욥1:3b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
동방 사람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라는 욥기의 말씀은 다른 한글 성경에서는 동방에서 가장 으뜸가는 부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은 부자로 산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성경 그 어디에도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훌륭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자라는 사실만 가지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매우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가난을 저주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못 본체 외면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잠28: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흠 잡을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욥의 완벽한 모습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욥의 일곱 아들이 자신들의 생일 때마다 돌아가며 잔치를 베풀고 나면 욥은 다음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서는 자녀들 숫자대로 번제를 올렸습니다. 욥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혹시라도 잔치 중에 술에 취해서 자신들도 모르는 중에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실수를 범하였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욥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기가 욥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부족하거나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완벽한 욥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절대로 욥처럼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되면 욥처럼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욥기를 이렇게 읽고 해석하면 욥기의 말씀은 도저히 우리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로 끝나고 말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욥처럼 그야말로 아무런 흠도 실수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이렇게 읽고 해석하려면 차라리 욥기를 모르는 것이 훨씬 더 신앙에 유익합니다.
그렇다면 욥기가 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욥에 대해 어떤 흠도 찾기 힘든 완벽한 사람으로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흠이 없는 완전한 인생이라할지라도 그 인생에도 도무지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예상치 못한 인생의 고통이나 고난에 대한 매우 중요한 욥기의 교훈입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습니다. 원인이 없이 결과만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원인을 알면 결과를 추측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죄를 지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측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 당연히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안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추측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고통을 겪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은 분명 죄를 지었을것이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래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인생의 고통이나 고난에는 분명 어떤 이유나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의 지식이나 능력으로는 그 이유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겪는 극심한 고통만 보고는 욥이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사람이 겪는 고통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라고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징벌를 내리시는 이유는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사필귀정, 인과응보, 상선벌악의 믿음입니다. 사필귀정, 인과응보, 상선벌악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적 이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원칙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필귀정, 인과응보, 상선벌악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필귀정, 인과응보, 상선벌악은 우리의 믿음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이상이며 꿈이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이 아닙니다.
도무지 흠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복을 누리던 욥에게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시련이 들이닥칩니다. 욥은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다 잃고 맙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실수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욥에게 닥친 엄청난 재앙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를 통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었던 내기를 메타포로 이해하고 해석해야지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되면 욥기를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말씀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욥기가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대화나 내기는 앞으로 욥기를 전개하기 문학적 장치이며 표현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게 사탄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부지런함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세상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대개 부지런하여 정보가 많은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사방을 쑤시고 다니면서 사람들 관계를 어지럽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간질하길 좋아하는 사탄에게 욥을 내 종이라고 부르시며 욥과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탄이 아무리 사람을 이간질하고 타락하게 만들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다고는 하지만 욥만큼은 사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틈을 낼 수 없다며 사탄을 도발하신 것입니다.
욥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에 사탄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사탄이 제기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비록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지만 욥이 아무런 이유도 까닭도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합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남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건강의 축복,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욥1: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실제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으면 물질의 축복, 자녀의 축복, 건강의 축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이런 신앙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복신앙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래된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앙 전통입니다. 심지어 기복신앙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신앙입니다.
욥기는 사탄의 입을 통해 물질의 축복, 자녀의 축복, 건강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남부러워 하는 복을 받았기에 또는 세상의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사탄의 문제 제기에 하나님께서는 욥의 생명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사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악한 사탄에게 욥이 모든 소유물을 마음대로 하도록 맡기신 것입니까?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소유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그가 누리는 소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욥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이것은 욥기가 사탄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강력한 영적 도전입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기복신앙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수 있는가? 아무런 보상이 없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부당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공의로우신 분으로 믿을 수 있는가?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신 것 같이 보이는 이 말씀은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이 사탄에게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비록 욥이 원인도 이유도 모른 채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것이 아무런 의미도 뜻도 없는 부질 없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고통이나 시련을 견디기 어려운 것은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느낄 때입니다. 아기를 낳는 어머니들이 죽을 것만 같은 산고의 진통을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자신이 겪는 극심한 진통의 의미를 알기에 그 진통을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욥기는 도무지 이유도 원인도 모른 채 고통을 겪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욥들’을 향해 이들이 겪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시고 있음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겪는 그 어떤 고통이나 고난도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