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욥기 1:13-22
욥기강해 세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예기치 못한 인생의 고통과 고난에 대해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깊은 깨달음과 영적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욥기는 욥에 대해 소개하기를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욥에 대한 평가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욥과 같이 온전하고 흠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욥에 대한 평가입니다.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던 그야말로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흠을 찾을 수 없는 욥은 완벽한 자녀의 축복과 이보다 더 풍성할 수 없는 물질의 축복까지 누렸습니다. 욥기가 욥에 대해 소개하면서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완벽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욥처럼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되면 욥처럼 완벽한 자녀의 축복과 물질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욥기를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하면 욥기의 말씀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욥처럼 아무런 흠도 실수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욥기가 욥을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흠이 없는 완벽한 사람으로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흠이 없고 죄가 없는 완전한 인생이라할지라도 그런 인생에도 도무지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고통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그 누구라도 원인도 이유도 알지 못하는 고통이나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아무런 흠도 없는 완벽한 욥에게 닥친 비극적이다 못해 참혹한 시련에 관한 말씀입니다. 욥은 모든 것이 완벽하여 그야말로 부족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였던 때에 영문도 모르는 재앙이 욥에게 닥쳤습니다. 욥에게 닥친 재앙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했던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모두 욥에게서 빼앗아 갑니다.
어느 날 종이 욥을 찾아와서는 스바 사람들이 들이닥쳐서는 오백 겨리의 소들과 오백 마리의 나귀를 모두 빼앗고 소와 나귀를 돌보는 종들을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아직 종의 보고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종이 찾아와서는 하늘에서 갑자기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서는 칠천 마리의 양떼와 목동들을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진짜 하나님의 내리신 불이라고 해석하기보다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자연재앙을 의미하는 메타포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두 번째 종이 아직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세 번째 종이 찾아와서는 갈대아 사람들이 삼천 마리의 낙타를 모두 빼앗아 가고 종들은 모두 죽였다고 보고합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복을 받은 자의 징표처럼 여겨졌던 어마어마한 가축과 종들이 그야말로 한순간에 안개가 흩어지듯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아마도 욥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욥에게 닥친 시련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겪은 시련보다 더 큰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종이 아직도 말을 하는 동안에 또 다른 종이 찾아와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을 보고합니다. 욥의 열 자녀들이 모두 맏아들의 집에서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풍이 불더니 집 네 모퉁이를 쳐서 집이 무너져 열 자녀 모두가 무너진 깔려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욥1:18-19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인생의 불행은 파괴적이기에 사탄스럽습니다. 도무지 아무도 예측이 불가능했기에 더 치명적입니다. 그리고 재앙은 사람을 통해서도 오고 자연 재해로도 옵니다. 상황을 되돌리거나 통제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적이며 참담한 소식을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욥1:20a 이 때에 욥은 일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욥이 자신의 겉옷을 찢는 것은 당시 유대 문화에서 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옷이 갈가리 찢어짐 같이 자신의 마음이 갈가리 찢어졌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머리털을 미는 것 역시 갑작스런 재난에 대한 애통을 나타내는 당시 중동의 관습적인 행위였습니다. 욥이 겉옷과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그가 겪는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크고 중한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욥기는 욥이 누렸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모두 잃어버렸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재해나 사고 또는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욥과 같이 완벽한 사람은 없지만 욥과 비슷한 파괴적이며 참담한 비극을 겪는 사람은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세상과 인생의 현실입니다.
올해로 9.11 테러가 일어난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날의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9.11테러로 인해 2,977명의 사망자와 25,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100억 달라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백억 달라는 한국 돈으로 11조가 넘는 엄청난 돈입니다. 이것은 욥의 겪은 재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재앙입니다.
지난 6월 24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있는 콘도미니엄 일부가 붕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났다며 많은 이사고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로 확인된 사망자만도 98명이고 재산 피해는 최소 1억 5천만 달러, 한국 돈으로 170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피해가 단 한순간의 붕괴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욥의 겪은 재앙과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비드19 팬데믹의 고통이 욥의 고통만 못할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코비드 팬데믹으로 인한 사망자가 어제 통계로 4,234,478명이며 인류가 겪고 있는 재산 피해는 도무지 계산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이것말고도 욥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재앙이나 비극적인 사건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비극적인 사건이나 재앙을 뉴스를 통해 거의 매일같이 들으면서도 이런 것들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로 여깁니다. 일종의 회피 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비극적인 사건을 매일같이 들으면서도 이것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의 이야기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앙이나 비극적인 사건들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며 비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인생은 한없이 연약하며,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재앙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비극적입니다. 이것은 굳이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아도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저절로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현실을 외면하며 살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욥기가 기록하고 있는 욥의 비극은 결코 비현실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욥기가 기록하고 있는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재앙이나 비극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지금도 여전히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대단히 현실적인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욥기의 재앙이나 비극보다 더 크고 심각한 재앙과 사건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욥기는 비극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세상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한 순간이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욥은 마냥 슬퍼하며 애통해 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애통의 시간이 끝나자 땅에 엎드려서는 하나님을 경배했다고 욥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욥은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라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욥1:20b-21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도대체 욥은 어떻게 그토록 절망적인 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과연 우리도 비슷한 재앙이나 비극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있는 것일까요? 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 비극적인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백하고 있는 알몸으로 태어나서 알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만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임을 가르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며 거두신 이도 여호와라는 욥의 고백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물질이나 소유의 허무함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2014년 4월 15일 세월호 사고로 생떼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떠난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부모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서도 세월호 사고를 딸을 잃은 전도사님이 계신데 지금도 여전히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자신에게 그토록 가혹한 재앙이나 고난을 겪게 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며 하나님을 떠나도 부족할 텐데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도 결혼한 딸이 일년도 채 안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겪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이런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상치 못한 재앙이나 시련을 겪게되면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이 격는 재앙이나 시련이 혹시 하나님의 징계나 벌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합니다. 물론 어떤 경우 우리가 겪는 시련이나 고난 가운데는 분명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고 하지만 자식의 생명이나 건강을 가지고 우리를 징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공의에는 결코 맞지 않습니다.
욥은 한 순간에 자신이 누려왔던 모든 것을 잃었고 심지어 자신의 열 자녀를 모두 잃었습니다. 비참하고 참담한 재앙을 겪으면서도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며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은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재앙과 비극적인 일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시는 벌이나 징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함정을 놓고 싶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욥이 가진 소유물을 모두 거두어가시면 욥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욕을 할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사탄의 장담대로 만약 욥이 자신이 겪는 상황을 정말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생각했다면 욥은 사탄의 함정에 걸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겪는 재앙과 시련을 부당하다 여겨 하나님을 욕하며 하나님을 떠났을 것입니다.
욥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하지만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주신다고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겪는 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어떻게 그럴수 있었습니까? 욥은 이전에 이전에 자신이 누렸던 풍요로움이 자신의 공로나 노력 때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이 겪는 고난도 자신이 잘못해서 자신을 벌주려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 아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하나님을 잘 믿기하면 항상 형통의 복을 받는다고 하는 이른바 형통의 신앙 또는 번영신앙에 대한 엄중한 책망이며 경종입니다.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세상에서 항상 형통하거나 번영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교묘한 함정입니다. 욥기는 이것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욥은 상상조차 힘든 재앙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욥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욥은 어떻게 그 엄청난 재앙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습니까?
욥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하나님을 제멋대로 생각하거나 함부로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시련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일을 자신의 힘으론 도무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재앙임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어려움과 아픔을 겪는 사람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아픔을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절망에 무릎 꿇지 않으려면 반드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지금 겪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도움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욥처럼 직감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바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욥과 같은 깨달음이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반드시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