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세 친구가 보여준 우정과 치명적 실수
욥기 2:11-13
욥기강해 다섯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욥의 세 친구가 보여준 우정과 치명적 실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계속되는 욥기의 말씀을 통해 인생을 살면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 하는 시간이 되어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바라보는 신앙의 깊이가 이전보다 더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동방 최고의 부자라고 칭송받던 욥에게 닥친 재앙과 불행에 대한 소문이 아주 멀리까지 퍼져갔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멀리 살고 있던 욥의 세 친구들에게도 욥이 겪은 소문이 들렸던 모양입니다. 좋은 소문보다는 나쁜 소문이 항상 빠르게 전파되는 것 같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급히 욥을 찾기로 약속하고는 같은 날 욥을 찾아왔습니다.
욥기는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 욥을 찾은 세 친구에 대해 소개하기를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욥을 찾은 이유는 욥이 겪는 불행을 직접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 찾았다고 욥기는 기록하였습니다.
욥2: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욥기는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 찾은 세 친구의 지역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욥기가 소개하고 있는 욥의 세 친구가 살던 지역이 정확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그 지역이 어디에 있는 곳인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굳이 욥기가 세 친구가 살던 지역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실제 존재했던 욥의 친구라고 여기게 하려는 문학적 장치쯤으로 여기면 됩니다. 또한 이들이 아주 먼 곳에서부터 욥을 찾아올 만큼 욥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먼 여정 끝에 마침내 욥의 세 친구가 욥 앞에 당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 눈 앞에 있는 욥을 단번에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왕처럼 고귀했던 그의 모습이 비참하고 참혹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잿더미에 앉아서는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자신의 종기를 긁어대고 있는 욥이 자신들의 친구 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욥을 찾은 세 친구들은 자신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참담한 욥의 모습을 보고는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머리 위에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칠일 밤낮을 그와 함께 잿더미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욥과 함께 그가 겪는 고통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세 친구들이 보여준 우정은 그야말로 대단한 우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2:12-13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여기까지가 욥기의 프롤로그입니다. 욥기는 크게 세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욥기 1장부터 2장까지는 욥기의 본래 이야기를 위한 프롤로그(Prologue)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욥기 42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에필로그(Epilogue)라 할 수 있습니다. 욥기 3장부터 41장까지가 욥기가 전하려하는 본래 이야기(Logu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산문체(이야기)로 기록되었고 본문은 독특하게 운문체(시)로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욥기 3장부터 41장까지는 욥이 겪는 고난에 대해 욥과 욥의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라는 사람과 벌이는 신앙논쟁입니다. 욥기의 핵심 부분인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욥기의 프롤로그라 할 수 있는 욥기 1장과 2장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욥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욥기의 소개입니다. 욥기는 욥에 대해 소개하기를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입니다. 욥기 1장과 2장은 이것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욥기 1장과 2장에 반복하여 나오고 있는 욥에 대한 평가는 단지 사람의 평가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욥1:1b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1:8b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2:3b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한 마디로 욥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인정받았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의롭다 인정받았던 욥에게 도무지 그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재앙과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욥은 그토록 심각한 재앙이나 고통을 겪을 만한 특별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펼쳐지는 욥과 욥을 찾아온 세 친구와의 계속되는 논쟁에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한 가지 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욥은 자신을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 찾아 온 세 친구와 기나긴 논쟁을 펼칩니다. 하지만 욥과 논쟁을 펼치는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미워했던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펴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과 기나긴 논쟁을 펼친 이유는 욥을 싫어하고 미워하여 그를 정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욥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먼 길을 마다하고 욥을 찾아왔고 그가 겪는 고통을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욥이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서 욥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욥과 세 친구와의 기나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 친구들의 이름에 담겨진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욥기는 욥이라는 이름에 담긴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뜻을 통해 욥이 가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욥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욥기는 욥을 찾은 세 친구의 이름을 통해 그들이 가진 신앙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 데만 사람 엘리바스입니다. 엘리바스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고난의 원인은 죄에 있다고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고난을 당한다.”는 주장으로 욥을 훈계하였습니다. 그가 생각하고 믿은 하나님은 “악한 자를 징계하시고 선한 자를 복 주시는 의로운 하나님”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수아 사람 빌닷입니다. 빌닷이란 이름은 “논쟁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역시 엘리바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역시 모든 고난은 반드시 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욥에게 “악한 자는 항상 고난 가운데 있다”고 훈계하며 욥이 재앙을 겪는 데에는 감추어진 죄가 있다며 숨긴 죄를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아마 사람 소발입니다. 소발이라는 이름은 “거친” 혹은 “지저귀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도덕론자나 원칙적인 교리주의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욥이 겪는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불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역시 엘리바스나 빌닷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든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욥을 정죄하고 책망합니다.
욥기의 핵심 이야기는 욥과 욥이 겪는 고난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들과 벌인 논쟁입니다. 그런데 욥과 논쟁을 펼치는 욥의 세 친구들의 주장을 읽으면서 가지게 되는 가장 큰 혼란은 욥과 논쟁을 벌이는 세 친구들의 주장이 우리가 들어도 너무나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욥의 주장보다 오히려 욥의 친구들의 주장이 훨씬 더 그럴듯하고 심지어 더 신실하게 보입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들의 주장은 당시 고대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이나 경험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을 정죄하고 있는 세 친구들의 주장을 딱히 틀린 주장이라고 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을 욥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타당한 것도 전혀 아닙니다.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 욥을 찾아온 세 친구들은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기초로 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욥에게 그대로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옳으니 욥에게도 옳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생각하고 경험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다고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고 할 때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뭐라고 합니까? 일반화의 오류라고 합니다. 일반화의 오류가 무엇입니까? 특별한 상황이나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을 모든 상황이나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반화의 오류라고 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과의 논쟁에서 보여주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이처럼 일반화의 오류는 스스로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일수록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반화의 오류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일반화의 오류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단순화의 오류입니다. 단순화의 오류는 특정한 사실을 무조건 일반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운동은 좋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운동이 좋지만 정말 모든 사람에게 운동이 좋을까요? 아니요. 사람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욥기는 신앙이 저지를 수 있는 단순화의 오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믿음이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인생의 고난은 죄로 인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지은 죄로 인해 벌을 받고 어려운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겪는 고난이 모두 죄 때문이라 주장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단순화의 오류입니다. 심지어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하고도 맞지 않습니다.
사람이 겪는 고난에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죄 때문에 겪는 고난도 많이 있으며, 심지어는 옳은 길을 가기 때문에 겪는 의인의 고난도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실수나 죄 때문에 겪는 고난이나 옳은 길을 가려고 하다가 겪는 고난이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받는 고난 보다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화 오류의 또 다른 유형으로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 두 사람이나 한 두 번의 경험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나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고 하는 것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합니다. 2012년 조선족 출신의 오원춘이라는 사람이 여자를 납치해 성폭행하려다가 저항하자 여자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조선족 출신 모두에 대한 매우 심각한 차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경우에 따라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로 확대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차별, 민족 차별, 성 차별등 각종 차별은 자신이 겪은 한 두 번의 특별한 경험을 일반화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자신들에게나 적용해야 할 원칙이나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한정하여 적용할 수 있는 자신들의 경험이나 신앙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던 욥에게 그대로 적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딱 맞는 영적인 원리라고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며 심지어 영적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들 상준이에게 지금까지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한 번도 이것에 대해 직접 미안하다고 말을 못했는데 이렇게 오늘 설교를 통해 용기를 내어 아들과 여러분들에게 고백하려고 합니다.
상준이가 다섯 살 때쯤 갑자기 눈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알러지인줄 알고 알러지 약을 사서 먹였습니다. 그 때부터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씩 아프다고 했습니다. 갈수록 아프다고 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며 아픈 이유를 찾아려고 그야말로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머리가 아프다고 CT도 찍고 눈이 아프다고 온갖 종류의 눈 검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마땅한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떤 의사가 속눈섭이 눈 안쪽으로 말려 눈을 찔러서 눈이 아프고 머리가 아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속눈섭을 바깥으로 마는 수술을 하라고 해서 초등학교 때 속눈섭을 바깥으로 마는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을 했는데도 머리 아프고 눈이 아픈 증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병원을 찾아 다녔는데 어떤 의사가 하는 말이 머리 아픈 건 사람마다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니 그 때마다 진통제를 먹고 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는 병원을 찾아 다니는 것을 중단하고는 아프다고 하면 진통제를 먹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다닐 때 눈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며 학교를 가지 못하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아프다며 학교를 못가겠다고 하는 아들에게 제가 뭐라고 했냐면 남자가 그 정도 아픈 것도 못참고 학교를 자꾸만 빠지면 어떠하냐며 아들을 억지로 학교 보내려고 했습니다. 물론 저 때문에 억지로 갈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나중에 상준이 병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병이 얼마나 힘들고 아프다는 것을 그때서야 아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도저히 미안했다고 말도 못할 정도로 미안했습니다. 지금도 미안해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아파도 좀 참고 학교에 가라고 했냐면 제가 학교 다닐 때 그렇게 했거든요. 아무리 아파도 학교는 절대로 빠지면 안 된다며 학교를 다녔거든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서는 아들이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겪으며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인생이나 신앙에는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방식이나 반드시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신앙의 방식은 없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방식이 있고 자신의 방식을 찾아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신앙생활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신앙입니다.
물론 인생에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같은 만고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어떻게 죽는가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아무리 나에게 꼭 맞는 것이라고 해도 내 생각이나 방식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차별하고 낙인을 찍는 영적인 폭력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공감하고 품어주고 용서하는 십자가 은혜가 나타나는 신앙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