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욥기 3:1-26
욥기강해 여섯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욥기는 욥처럼 부당한 억울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계속되는 욥기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고통에 대해 깊이 성찰 하는 시간이 되어 이전보다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욥기 3장은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욥은 자신에게 닥친 비극적이며 비참한 운명을 모두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욥은 갑자기 돌변하더니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한탄합니다.
욥3: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여기서 그 후는 욥의 세 친구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와서는 칠일 밤낮을 아무 말도 못하고 함께 애통한 이후를 의미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불행한 일을 겪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고 욥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고귀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비참한 몰골로 변해 버린 욥을 보고는 도무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욥과 욥의 세 친구들은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칠일 밤낮을 지내고 나서야 비로소 욥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참담하고 비극적인 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함을 지켜왔던 욥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물론 욥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한탄하며 자신을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욥3:3-4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과 고난 그리고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인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욥의 절규와 탄식이 너무나 마음 아프게 들립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욥의 탄식에서 생소한 표현이 있는데 8절에 나오는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사탄, 마귀와 같이 신에게 쫓겨난 악한 권세자를 나타내는 이교도들의 개념입니다.
욥3: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삶과 생명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한 삶의 자세이며 태도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지나치게 얽매여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원망하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과연 비극적인 재앙과 비참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욥이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을 한탄하고 원망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인생의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일까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머리나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으로 깊이 경험하기 위해선 어쩌면 인생의 깊은 나락에 떨어지는 경험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비극적이고 비참한 고난을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난으로 인해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더 깊이 알게 된 것입니다.
동방 최고의 의인이며 부자였던 욥은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들은 욥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는 그를 불행하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아마 우리도 비참한 상황에 놓인 욥의 모습을 보며 욥의 세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욥이 겪는 재앙이나 비극은 하나님께서 욥을 버리신 것도 그를 벌 주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욥을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의인이라 칭찬하셨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욥이 겪는 고난에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욥은 자신이 겪는 고난을 통해 지금까지 머리로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겪게되면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사람들은 아직 인생의 진짜 고난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자신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성도님이 저에게 고백하시길 자신이 의지하고 기대했던 것이 모든 무너져버려 자신이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는 없었던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회에 나가서 소리높여 우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의지하거나 기댈 수 있는 것들이 완전히 다 사라져 버릴 때에만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이 비로소 깨달아지고 믿어지게 됩니다.
욥이 그토록 비극적이며 비참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이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끝내 하나님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는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재산도, 자식도, 아내도, 친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태어난 날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욥의 탄식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아닙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길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지금 굶주린 사람이 복이 있고,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굶주림 사람이 복이 있고, 우는 자가 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지극히 역설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눅6:20-2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나 지금이나 누구라도 가난한 자보다 부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굶주린 자보다 배부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우는 자보다 웃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은 왜 가난한 자가, 굶주린 자가 그리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가나한 자, 굶주림 자 그리고 우는 자는 세상에 믿고 의지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이미 가진 것이 너무 많고, 의지할 것이 너무 많고, 믿을 사람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절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고 의지할 사람이나 돈이 없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역설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태어난 날을 원망하고 저주하였던 욥의 탄식은 이내 죽음에 대한 찬양으로 바뀌게 됩니다. 욥은 어쩔 수 없이 세상에 태어나게 됐다면 차라리 어머니가 해산할 때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절규합니다.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곧바로 죽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비극적이고 비참한 고통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 절규합니다.
욥3:11,13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여러분은 모든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겪어야는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가장 힘든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에게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가장 힘든 고통이며 슬픔이고 절망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 3장의 말씀에는 우리 인생에는 죽음보다 더 크고 힘든 고통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죽음보다 더 크고 힘든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각한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매일 밤 고통에 몸부림치다 기절할 때마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들 말합니다. 긴긴밤을 지새우는 것도 힘겹지만 또 다시 아침을 맞는 것은 더욱 힘들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죽을 용기로 살면 못할 일이 뭐가 있냐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정말 인생이 무너질 것 같은 억울한 일, 부당한 일, 답답한 일을 겪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남의 말 할 때나 하는 말입니다.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만을 인생의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는 이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죽지 못해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이 모두 현대판 ‘욥’이라 생각합니다.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난과 고통을 겪고 있는 욥에게는 살아있는 세상보다는 죽은 자들의 세계는 훨씬 더 매혹적입니다. 그가 바라본 죽음의 세계는 심판과 형벌이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는 욥에게 죽음은 세상에서의 모든 부조리가 끝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고통이나 불안이 없이 영원한 평안을 누리는 곳이었습니다.
욥3:17-19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전통적으로 구약성경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이나 형벌이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옮겨감’ 혹은 ‘열조(조상들)에게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욥기 3장은 욥이 얼마나 죽음의 세계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어야 하는 부조리한 세상을 더는 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살아 숨쉬기 보다는 차라리 절대 평등과 절대 안식이 있는 죽음의 세계로 도피하고 싶었습니다.
욥은 죽음의 세계를 그리워합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악한 자들이 설치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며, 더는 감독하는 사람들의 호통소리를 들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구별도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별이 하나도 없는 완전히 평등한 세계였습니다. 이것은 ‘욥’이라는 한 개인의 탄식만이 아닙니다. 욥기가 기록될 당시 도탄에 빠져 있던 유대 백성들의 간절한 바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불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아닙니다. 자신이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비웃음 당하고 욕을 먹기에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가장 근본적인 인생의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인생, 죽고 싶어도 도무지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을 한탄하는 것입니다.
욥3:20-22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욥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겨 간절히 죽음을 구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죽음이라는 은총조차도 안겨주시지 않으십니다.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시고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욥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빛과 생명을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도 감사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빛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더 힘들어 합니다. 이런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 23절의 말씀입니다. 욥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둘러 싸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욥3: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말씀을 마칩니다. 욥기 3장에서 욥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죽음과 죽음의 세계를 찬양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욥은 지금 이유를 알 수 없는 지극히 부조리하고 부당하게 여겨지는 고통에 놓여있습니다. 부조리하고 부당한 고통을 겪는 욥에게 구원이란 오직 죽음 밖에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처럼 보이는 죽음마저 막고 계십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욥에게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역설적이지만 욥기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아 보이는 고통스러운 인생이라도 살아야 하는 인생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죽음보다 못한 삶을 계속 살아가도록 빛을 주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죽지 못해 살아가야 하는 인생에게 주는 성경의 질문입니다.
반복하여 강조하지만 욥기는 내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욥기는 이유를 알 수 힘든 부조리하고 부당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읽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바라기는 욥기의 말씀을 통해 죽음보다 못한 삶에도 반드시 살아야 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음을 깨닫고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