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욥기7-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욥기 4:1-5:27

 

욥기강해 일곱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욥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므로 내가 겪는 고난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욥기 3장에서 욥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과 고난으로 인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탄식을 늘어놓았습니다. 욥기 3장에 나오는 구구절절한 욥의 원망과 탄식을 한 문장으로 나타낸다면 죽음보다 못한 비참한 삶을 과연 살아야 하는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보다 못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원망하며 하나님께서 당장이라도 자신의 생명을 가져가 주시길 소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는 것이 너무나 비참하여 죽기를 소원하는 욥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욥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탄식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욥기 3장에 기록된 욥의 탄식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저는 욥기 3장을 읽으며 아무리 죽음보다 못한 비참한 삶처럼 여겨지는 삶이라도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설령 죽음보다 비참하게 여겨지는 삶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더라도 죽기 보다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욥의 거침없는 원망과 탄식을 들은 욥의 세 친구 가운데 한 명인 엘리바스가 욥을 훈계하고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욥기는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욥을 훈계하고 책망하는 엘리바스의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욥기 4장과 5장에 기록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훈계와 책망의 핵심은 욥기 47절과 8절의 말씀입니다. 엘리바스는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죄 없는 자가 망한 경우도 없고, 정직한 사람이 멸망하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욥이 그토록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겪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을 욥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이라 여깁니다.


4:7-8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의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그 이유를 알수 없는 고통과 고난으로 인해 욥은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소연을 늘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엘리바스는 욥이 겪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과 고난을 심은 대로 거둔다는 추수의 법칙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추수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콩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 심으면 팥을 거두는 것이 추수의 법칙입니다. 콩 심은데 팥을 거둘 수 없고, 팥 심은데서 콩을 거둘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엘리바스는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연의 법칙처럼 사람의 인생 역시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심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이 달라진다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욥의 고난에 대해 엘리바스의 주장은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고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라고도 합니다. 추수의 법칙이나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르면 욥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은 모두 그가 뿌린 죄악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 세계는 물론이고 인간 사회에 있어서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법칙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뿌리는가에 따라서 그 열매가 결정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콩을 심었지만, 팥을 심었지만 아무 것도 거둘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입니까? 홍수가 나거나 극심한 가뭄이 들면 무엇을 심었든지 상관없이 아무 것도 거둘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상 뿌린 대로 거둘 수 있던가요? 죄 없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세상에는 일어나지 않는가요? 정직한 사람이 망하는 경우가 세상에는 벌어지지 않는가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했는데 돌아오는 결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씨앗을 뿌렸는데 고난과 재앙의 열매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욥입니다.


욥은 동방 최고의 의인으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그야말로 온전하고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욥이 온전하고 신실하다는 것은 사람의 평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온전하고 신실했던 욥은 사탄의 시기와 참소로 엄청난 재앙을 겪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엘리바스가 내세우는 추수의 법칙은 욥에게 적용될 수 없는 법칙입니다.


물론 인생의 고난에는 분명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고난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나 고난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도무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어려운 고통이나 고난도 있습니다. 이것은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실존이며 현실입니다.


욥을 훈계하고 책망하는 엘리바스의 결정적 실수가 무엇입니까? 엘리바스는 자신이 본 욥이 겪는 고통과 고난의 결과만 보고 그가 겪는 고통과 고난의 원인을 제멋대로 추측한 것입니다. 앞서도 설명을 드렸지만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통과 고난에는 내 잘못이나 실수로 인한 자업자득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로 인해 엉뚱하게 내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그 누구의 잘못이나 실수를 따지기 어려운 경우도 분명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가 내세우고 있는 심은 대로 거둔 다는 추수의 법칙은 우리에게 적용할 수 없는 잘못된 가르침입니까? 아니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단호하고 분명하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사람이 심은 것을 거두는 추수할 때를 사람의 관점이나 시간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있는 썩어질 것을 거두거나 영생을 거두는 때는 사람이 정한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 서기전까지는 과정을 사는 것이지 결과를 얻는 때가 아닙니다.


욥이 겪는 고통과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그가 견뎌내야 하는 인생의 과정이지 최종결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인생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전까지는 지금 누리고 있는 성공이나 풍요가 우리의 영원한 결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고통이나 고난을 겪고 있다면 이것 역시 우리의 영원한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에게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추수의 법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분명해 집니다. 추수의 법칙은 내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지고 자신의 삶이나 타인의 삶에 대해 함부로, 섣불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추수의 법칙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느냐에 따라 나중에 거둘 것이 무엇인지가 결정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장차 거둘 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무슨 씨를 뿌리며 살아야 하는 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금 악한 일을 하면서 장차 좋은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지금 선한 일을 하면서 당장 선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반드시 뿌린 대로 그리고 심은 대로 거두는 때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추수의 법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지 자신이나 타인의 인생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법칙이 아닙니다.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욥을 훈계하고 책망하는 엘리바스의 말이 욥기 5장에서는 조금씩 거칠어지지 시작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향해 하늘에 계신 그 어떤 거룩한 존재도 너의 원망과 하소연을 들어줄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단정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엘리바스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차리라 죽는 것이 낫다고 원망과 탄식을 늘어놓는 욥을 불경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5:1-2 어서,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하는 이가 있겠느냐 하늘에 있는 거룩한 이들 가운데서, 그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 있겠느냐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질투 때문에 죽는 법이다.


엘리바스는 어떤 경우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람이 원망하거나 불평하면 안 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바스가 믿었던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로 잰든 정확하게 선과 악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의 확신을 보여주는 말씀이 욥기 53절의 말씀입니다. 엘리바스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신다고 믿었습니다.


5:3 어리석은 사람의 뿌리는 뽑히고, 어리석은 자의 집이 순식간에 망하는 것을, 내가 직접 보았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과 고난의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엘리바스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재앙이나 고난에는 반드시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재앙이 흙에서 일어나는 법이 없고, 고난이 땅에서 솟아나는 법도 없다는 엘리바스의 주장입니다.


5:6 재앙이 흙에서 일어나는 법이 없고, 고난이 땅에서 솟아나는 법도 없다.


엘리바스의 훈계는 점점 단정적이 되어 갑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단정했습니다. 따라서 욥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복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징계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훈계를 기꺼이 받아들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라고 합니다.


5:17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그래도 복된 사람이다. 그러니 전능하신 분의 훈계를 거절하지 말아라.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훈계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내려진 징계를 달게 받으면 하나님께서 욥이 겪는 모든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그를 구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주장만 딱 떼어 놓고 읽으면 흠잡을 데 없는 대단히 은혜로운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은혜로운 말이라도 어떤 사람에게 하느냐, 어떤 상황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비수가 될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5:18-20 하나님은 찌르기도 하시지만 싸매어 주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지만 손수 낫게도 해 주신다. 그는 여섯 가지 환난에서도 너를 구원하여 주시며, 일곱 가지 환난에서도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해 주시며, 기근 가운데서도 너를 굶어 죽지 않게 하시며, 전쟁이 벌어져도 너를 칼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훈계와 책망은 축복으로 마칩니다. 욥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시련에서 회복시키시고 이전보다 더 큰 복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합니다.


5:24-26 그래서 너는 집안이 두루 평안한 것을 볼 것이며, 가축 우리를 두루 살필 때마다 잃은 것이 없는 것을 볼 것이다. 또 자손도 많이 늘어나서, 땅에 풀같이 많아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곡식단이 타작 마당으로 가듯이, 너도 장수를 누리다가 수명이 다 차면, 무덤으로 들어갈 것이다.


욥기가 욥을 온전하고 흠이 없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엘리바스의 훈계를 읽으면 그의 훈계는 하나도 틀린 말이 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엘리바스는 사람이 겪는 재앙이나 고난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욥이 겪은 재앙과 고통 역시 그가 지은 죄 때문에 겪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엘리바스의 주장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로 잰 듯이 엄격하신 분이셔서 인간의 모든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 반드시 징계하시고 벌주시고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신가요? 그래서 일부 목사의 주장처럼 교통사고가 나면 주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고, 암에 걸리면 십일조를 떼 먹었기 때문인가요?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믿으십니까?


엘리바스의 주장은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충고는 그야말로 욥에 대한 선의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의로 하는 말이라도 옳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말만 따로 떼어내서 읽으면 그의 주장은 구구절절 다 옳은 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욥이 겪은 재앙과 고통에 적용하게 되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맞는 말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비록 엘리바스의 주장이 시의적절한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사람보아가면서, 상황을 보아가면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틀린 말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엘리바스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며 삽니다. 내 믿음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사람이나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렇고 교우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입장의 동일함,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이야 말로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자세이며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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