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욥기8-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욥기 6:1-7:21

 

욥기 강해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계속되는 욥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므로 자신을 더 깊이 알게 되며 나아가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믿음의 성숙이 있기를 바랍니다.


욥기는 인생을 살면서 인간의 삶에 닥치는 예상치 못한 또는 그 원인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이나 고난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닥친 예상치 못한 재앙이나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욥기를 끝까지 읽고 나면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예상치 못한 재앙이나 이유를 알기 힘든 고난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욥기를 끝까지 읽어 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욥기를 끝까지 읽어도 욥기가 제시하고 있는 이런 문제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욥도 분명한 답을 찾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욥에게 분명한 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미리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욥이 자신이 겪은 재앙과 고난에 대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는 답을 얻지 못하지만, 계속되는 친구들과의 논쟁과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고난에 대한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 성경이 일일이 대답해주지는 않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비슷한 답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장 나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확실하고 분명한 대답이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 욥기를 깊이 묵상하면 인생의 고난에 대해 성경이 주는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욥의 세 친구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엘리바스가 욥을 훈계하고 책망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엘리바스의 말투는 대단히 점잖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욥의 상처 난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가 숨겨져 있습니다. 신랄한 말도 아프지만 점잖은 체하는 말이 때론 더 아플 때도 있는 법입니다.


엘리바스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추수의 법칙을 가지고 욥이 겪는 고통과 고난을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겪고 있는 엄청난 재앙과 고통을 보고는 그를 불의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욥이 겪고 있는 재앙과 고통은 모두 그가 뿌린 악한 일에 대한 열매를 거두는 것이라며 욥을 엄히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4:7-8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엘리바스의 가시 돋친 훈계와 책망을 들은 욥은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였습니다. 하지만 엘리바스는 욥의 억울한 하소연을 듣고도 그를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자신의 잣대로 책망했습니다. 욥의 절친이라는 엘리바스는 도대체 왜 욥의 간절한 하소연을 듣고도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불의하게 여겨 훈계하고 질책만 했을까요?


엘리바스는 욥에게 일어난 엄청난 재앙과 고난을 자신이 가진 믿음으로만 판단하고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가진 믿음으로는 욥이 그토록 엄청난 재앙과 고난을 겪는 데에는 반드시 그가 남몰래 저지른 악행이 있기 때문이라 믿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토록 엄청난 재앙이 닥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엘리바스의 믿음만은 아닙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던 세 친구 모두가 가진 믿음이었으며 당시 대다수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에 의하면 욥은 남몰래 숨기고 있는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욥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가 감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믿었던 추수의 법칙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추수의 법칙을 욥에게 적용하였던 엘리바스의 훈계와 책망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엘리바스가 판단한 것처럼 욥에게는 숨겨둔 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는 왜 자신의 친구를 불의한 자로 정죄하는 중대한 실수를 한 것입니까?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확신하고 자신이 아는 것이 세상 전부이며, 하나님의 전부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단 엘리바스에만 나타나는 문제이며 실수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며 실수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엘리바스와 같은 실수를 저지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도무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기 생각, 자신의 확신, 자신의 믿음으로 제한하는 일을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자주 합니다.


그럼 자신이 가진 잣대로 욥을 훈계하고 책망했던 엘리바스만 하나님을 제멋대로 오해한 것이고 욥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욥이 엘리바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남모르게 하나님께 지은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욥 역시 엘리바스와 별반 다르지 않게 하나님을 제멋대로 오해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제멋대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고난과 고통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전능하신 분께서 자신을 과녁으로 삼고 자신에게 화살을 쏜다며 한탄하였습니다. 자신은 전능자가 쏜 화살에 맞아 고난을 겪고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욥기 6장과 7장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생각입니다.


6:4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 하나님이 나를 몰아치셔서 나를 두렵게 하신다.

7:14 주께서는 악몽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무서운 환상으로 저를 떨게 하십니다.

7: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욥기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 하소연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욥기 6장과 7장에 나오는 욥의 한탄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로 가득합니다. 욥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엘리바스의 생각과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두 사람의 생각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욥은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과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엘리바스는 욥이 남몰래 저지른 악한 일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이 받는 재앙을 욥이 남몰래 저지른 죄에 대한 벌로 여긴 엘리바스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자신이 겪는 재앙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여기는 욥의 믿음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욥이 겪는 고통과 고난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욥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 아니라 욥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이 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자신이 겪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래서 부당하다고 여기는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여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욥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고 다스린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신실하다고 하는 교인 중에도 욥과 같이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은 것입니다.


얼핏 이런 믿음이 대단히 신실하고 바른 믿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런 믿음이 세상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일까요?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의 욕심과 탐욕이 더 많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이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6:10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하는 교인들 가운데 무슨 일이 생기든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복권이 당첨돼도 하나님의 뜻, 교통사고가 나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물론 모든 일을 하는 데 있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 좋은 믿음의 자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나 주변에 일어난 모든 일 또는 교회에 일어난 모든 일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왜곡할 위험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곳이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나에게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것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라도 모두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이나 연단이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전보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을 위로한다고 찾아온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기보다는 상처만 받았습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원했던 것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함께 탄식하며 공감해주는 친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욥을 찾은 친구들은 그가 겪고 있는 재앙과 고통이 엄청난 것을 보고는 욥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책망했습니다. 욥은 이런 친구들의 모습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6:14-15 내가 전능하신 분을 경외하든 말든, 내가 이러한 절망 속에서 허덕일 때야말로, 친구가 필요한데, 친구라는 것들은, 물이 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흐르는 개울처럼 미덥지 못하고, 배신감만 느끼게 하는구나.


욥을 위로하려고 찾아온 세 친구는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욥에게 상처만 더하고 만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까? 친구들은 욥을 책망하고 정죄하기 전에 먼저 그의 입장이 되어 그가 겪는 고통과 고난을 생각해 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준과 잣대로 욥이 겪는 고통과 고난을 제멋대로 판단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저지른 실수는 교인들에게도 자주 볼 수 있는 실수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자신이 가진 신앙의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하려 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사람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영혼에 심각한 상처를 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실수를 가장 자주 범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종교 전문가라고 여기는 목사들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이 교인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가장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스스로 자신의 믿음이 가장 좋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교인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무언지 아십니까? ‘기도 안 해서 그래.’ 아마도 이것은 남들보다 자신이 기도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입니다. 저도 기도 좀 하는 분들에게서 이런 말 자주 들어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말은 영적 교훈이나 위로가 아니라 영적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말 기도를 안 해서 생겨나는 문제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 안 해서 그래라는 말을 모든 사람 또는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만능 처방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 기도를 안 한다고 해도 기도 안 해서 그래라고 말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제 생각일 수 있지만 저는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신앙 처방은 본인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영성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똑같은 방법으로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삶의 자리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를 비롯한 세 친구는 자신들이 마치 욥의 선생인 양 욥이 겪는 고통과 고난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만일 욥의 세 친구가 욥과 비슷한 처절한 고통과 고난을 겪어 본 경험이 있었다면 아마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머리로만 알고 있는 신앙 지식과 전통으로 욥의 겪는 고통과 고난을 판단하고 훈계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욥의 친구들이 오해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욥의 원망과 하소연은 조금도 불경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던 예수님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식 또는 원망이나 하소연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싶은 인간의 간절함이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겪는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여기는 욥의 믿음에도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여기는 것은 결코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게 되면 부당하고 불의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잘못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려는 그 어떤 시도나 노력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욥이 겪는 고통과 고난은 그로서는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하고 불의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하나님께 항변하고 하소연하는 믿음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겪는 부당하고 불의한 고통과 고난마저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진짜 불신앙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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