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욥기 8:1-22
욥기 강해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욥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신앙이나 교리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바라기는 계속되는 욥기 말씀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을 뛰어넘어 하나님과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되는 욥기의 말씀은 욥이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겪는다는 소문을 듣고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신앙논쟁을 하는 말씀입니다. 욥은 세 친구에게 자신이 겪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도무지 그 원인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억울하고 부당한 것이라며 탄식과 하소연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이러한 탄식과 하소연을 조금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욥과 엘리바스가 주고받는 논쟁을 지켜본 빌닷은 욥에 대해 매우 화가 난듯합니다. 빌닷은 욥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다며 욥을 꾸짖습니다. 빌닷이 욥의 말을 거센 바람과 같다고 한 것은 욥의 탄식과 하소연이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빌닷은 자신이 겪는 고통과 고난이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욥의 탄식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말이라 여긴 것입니다.
욥8: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빌닷은 왜 자신의 억울함을 탄식하고 하소연하는 욥의 말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거센 바람과 같다고 한 것입니까? 빌닷은 드러난 결과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빌닷은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좋은 일이 있으면 선한 일에 대한 상급이고 나쁜 일이 있으면 악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빌닷은 욥이 열 자식 전부와 전 재산을 잃는 재앙을 겪었으며 심지어 그의 온몸에 난 흉측한 종기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모든 것이 욥이 지은 죄의 결과라고 여긴 것입니다. 빌닷은 한날한시에 열 자식 모두를 잃어버린 욥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욥의 열 자녀가 죽은 것은 저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욥8: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빌닷의 신앙과 신학은 너무 무섭다 못해 잔인합니다. 도대체 욥의 열 자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죄를 지었다고 여겼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했다고 여기는 것일까요? 도대체 욥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기에 열 자식 모두를 잃고 전 재산을 잃었으며 자신은 흉측한 종기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 어떤 죄도 참지 못하셔서 가혹한 형벌이나 죽음을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까? 과연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십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빌닷이 믿는 하나님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시기보다 인내하고 용서하시기를 즐겨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빌닷은 욥에게 훈계하길 네가 만일 청결하고 정직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너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얼핏 빌닷의 말은 대단히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빌닷의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이라고 가정하며 말하는 빌닷의 훈계에 담긴 진짜 의도가 무엇입니까? 빌닷은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을 그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지 않고, 그가 청결하고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겪는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욥8:5-6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그렇다면 빌닷의 주장처럼 욥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 전능하신 분에게 간구하지도 않고, 청결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은 불한당 같은 악한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세상에 둘도 없는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그야말로 누구보다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닷은 자신이 가진 믿음, 자신이 가진 편견을 가지고 욥의 죄를 기정사실처럼 여긴 것입니다.
욥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빌닷이 가진 신앙과 신학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빌닷은 마음의 청결과 정직하며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핏 대단히 그럴듯한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청결이나 정직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로를 세웠거나 선한 일을 하였기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 그대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청결과 정직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빌닷은 왜 욥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제멋대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드러난 결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자신의 오랜 신앙 전통과 믿음을 절대시하였습니다. 빌닷은 욥이 겪고 있는 엄청난 재앙과 고통을 보면서 그에게 숨겨둔 죄가 없다면 도저히 이런 고통을 겪을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빌닷처럼 드러난 결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을 저는 결과주의 신앙이라고 구분하고 싶습니다.
결과주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그 사람의 믿음이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과주의 방식을 따르면 아무리 좋은 의도와 마음을 가지고 했다고 해도 결과가 나쁘면 실패한 일 또는 나쁜 일이라고 여깁니다. 반대로 비록 나쁜 의도나 삐닥한 마음을 가지고 했지만, 그 결과가 좋으며 성공한 일 또는 좋은 일로 여깁니다.
드러난 결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결과주의는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이며 세상적인 방식이지 기독교 신앙의 가치와 방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결과주의와 비슷한 가치와 방식으로는 성과주의, 성공주의, 번영주의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결과주의와 비슷한 대단히 세속적인 가치이며 세상적인 방식입니다. 이런 것은 결코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가치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드러난 결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빌닷의 신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입니다. 빌닷의 말이 너무나 그럴듯한지 많은 교인이 이 구절을 쓴 액자나 현판을 집이나 사업장에 걸어 놓고는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욥을 정죄하기 위해 사용된 빌닷의 주장을 아무리 듣기에 그럴듯하다고 마음대로 사용해도 괜찮은 것인지요?
욥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빌닷의 주장을 요즘 식으로 하면 “예수 성공, 불신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이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믿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목사들의 입발림을 그대로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교인들은 자기 신앙이 대단히 좋은 줄 압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성공했다고 자랑합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교인들은 자신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자신이 뭘 잘못해서 그런가 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일전에 한 번 설교했던 내용입니다. 아마도 기억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전 제가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 한국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목사가 부흥회 강사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의 설교가 너무나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설교가 있습니다.
부흥회 강사로 온 목사는 스스로 자신을 성공한 목사라고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자랑처럼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 목사는 분명 성공한 목사처럼 보였습니다. 천여 명의 교인을 목회하는 큰 교회 담임목사에다가, 기독교계에서도 이름께나 알려진 유명한 목사였습니다. 일 년 내내 부흥회 강사로 전국은 물론 해외까지 부흥회를 다니는 목사였습니다. 분명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목사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성공한 목사라고 자랑하는 목사가 자신이 성공한 목사가 될 수 있었던 기도 비법을 가르쳐 줄 테니 자신이 가르쳐 준 대로 기도하기만 하면 모두가 자기처럼 성공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습니다. 부흥회 참석한 모든 교인이 성공할 수 있는 놀라운 영적 비결이 있다는 목사의 말에 귀를 쫑긋하고는 열심히 설교를 들었습니다.
부흥회 강사로 목사가 가르쳐 준 기도의 비법입니다. 자신은 새벽기도마다 하나님께 엎드려 이렇게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님만 손해입니다. 그러니 제가 성공하게 해주세요. 제가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님만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니 제 목회가 꼭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더니 정말 하나님께서 손해 보지 않으시려고 창피당하지 않으시려고 자신을 성공한 목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부흥회에 참석한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님만 손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병들고 실패하면 하나님께서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건강하게 해주시고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듣는 내내 너무 불편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부흥회 강사의 설교를 들으며 저는 같은 목사로서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흥회에 참석한 교인들 거의 모두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부흥강사의 궤변에 큰 소리로 “아멘, 아멘”을 하며 소위 교회에서 말하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모습을 보며 순간 제가 이상한 건지 교인들이 이상한 것인지 헷갈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가르치기를 약한 것들을 자랑하라고 가르쳤지 내가 제일 잘 나가고, 내가 제일 성공하고, 내가 제일 부유한 것을 자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약할 때, 병들었을 때, 핍박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하셨지 내가 잘 나가고, 성공하고 부유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약한 것을, 고난받는 것을, 고통당하는 것을, 핍박받는 것을, 멸시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고후12:9-1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교회에서 나를 높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달라는 기도와 설교가 난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험이나 승진, 사업이나 건강 등 우리 삶의 전 분야에 걸쳐 성공, 건강, 출세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믿습니다. 반면에 실패, 질병, 가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분위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사람의 성공과 출세와 부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공주의나 결과 만능주의 신앙이 주도하는 교회에서는 인생에서 실패를 겪는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기 힘들게 만듭니다. 실패나 질병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과 교인들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 때에 위로와 격려는커녕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죄라도 지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만듭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교인들의 위로와 도움이 가장 필요할 때에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빌닷이 보여준 결과주의 신앙이 교회에 끼친 악한 영향력입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 제가 사업에 꼭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크게 출세해서, 성공해서, 유명해져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응답하실까요? 하나님께서 너 꼭 성공하고 유명해져서 내게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아니요. 저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목사와 교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과 탐욕이 만들어 낸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르치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이 만들어 낸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는 것을 믿음이 아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우상숭배입니다.
출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어떤 과정이나 방법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드러나는 결과만 좋으면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알신앙이며 맘몬신앙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드러나 결과가 좋다고 해도 그 과정이 옳지 않으며, 그 의도가 바르지 않으면 악한 일이라 여기십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드러난 결과가 나쁘다고 해도 그 동기와 과정이 옳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최선을 다했어도 실패로 끝나는 일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실하고 정직하게 믿음을 지키며 살았다고 해도 세상에서의 결과는 좋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욥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직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거부하는 불의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드러난 결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죄를 짓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빌닷은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는커녕 자신이 가진 잣대로 욥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를 짓고 맙니다. 자기 딴에는 욥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지만 정작 그가 한 말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그에게 상처만 주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마다 심각하게 왜곡하는 말뿐이었습니다. 빌닷은 왜 이토록 심각한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까? 자신이 알고 있고 믿는 것이 신앙의 전부, 하나님의 전부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도 너무나 쉽게 빠지는 함정이며 실수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책 한 권 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내가 알고 있고 믿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전부가 아닌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깊이 알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알아갈수록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 작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하나님을 들먹이며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