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욥기10-낯익은 하나님, 낯선 하나님

낯익은 하나님, 낯선 하나님

욥기 9:1-10:22

 

욥기 강해 열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낯익은 하나님, 낯선 하나님”(익숙한 하나님, 생소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빌닷의 정죄와 책망에 대한 욥의 항변입니다. 반복하지만 욥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신앙이나 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욥기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을 뛰어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욥의 친구 빌닷은 자신이 가진 전통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비참한 재앙과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욥을 정죄하고 책망했습니다. 욥을 정죄하고 책망하기 위해 빌닷이 내세운 신앙이 무엇이었습니까? 결과주의 신앙이었습니다. 결과주의 신앙이란 드러난 결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드러난 결과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사람의 현재 꼬락서니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비참한 재앙과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마을에서 쫓겨나 쓰레기 더미에서 사는 욥의 꼬락서니를 보고는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라 단정했습니다. 욥의 열 자식이 한날한시에 죽은 것도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빌닷이 믿는 하나님은 공의롭고 정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가 없는 사람에게는 결코 재앙이나 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죄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감추고 숨긴다고 해도 반드시 그 죄를 벌주고 심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빌닷은 욥이 겪고 있는 재앙과 고통을 인간의 죄와 악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빌닷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지금 우리가 겪는 코로나19 팬데믹도 하나님의 심판이고, 내가 겪는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도 하나님의 심판이고, 내가 겪는 상처나 아픔도 모두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념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제멋대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것들을 특별히 잘 이용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드러난 현상이나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남발하며 교인들을 위협합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 또는 조건부 종말론이 빌닷과 같은 부류에 해당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닷은 하나님은 곧 정의의 집행자라는 신념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빌닷은 하나님의 정의를 내세워 욥을 정죄합니다. 빌닷은 욥에게 벌어진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정의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빌닷의 주장만이 아니라 욥을 찾아온 세 친구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믿음이기도 합니다.


8: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매정하다 못해 잔인한 빌닷의 주장에 대해 욥이 대답합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빌닷의 주장에 대해 그렇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고 항변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의롭고 정직하고 순전하다고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빌닷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따진 것입니다.


9:2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


또한, 욥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천하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미천하고 작은 존재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일에 대해서 자신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탄식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욥은 하나님께 중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겪는 재앙과 고통이 정말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아무리 결백과 무죄를 주장해도 하나님의 정의와 뜻은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기에 아무런 소용도 없다며 탄식합니다.


9:20-22 비록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내 입을 시켜서 나를 정죄하실 것이며,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나를 틀렸다고 하실 것이다. 다만, 산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한 가지로만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께서는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한 가지로 심판하신다 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욥의 친구들은 비참한 재앙과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욥을 보고는 그가 이런 일을 겪는 데에는 반드시 타당한 원인이나 이유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생각하고 믿었던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의 원인과 이유는 욥이 하나님께 심각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의 주장을 도무지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은 이런 재앙과 고통을 겪을 만한 죄가 없음에도 억울하고 부당한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욥의 심정이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했는지 욥은 자신과 하나님이 법정에 가서 재판관 앞에서 시시비비를 따져 보고 싶다며 한탄을 늘어놓습니다.


9:32-33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람이기만 하여도 내가 그분께 말을 할 수 있으련만, 함께 법정에 서서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으련만.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이것은 지금까지 인생의 유일한 재판관이자 심판자라고 믿어왔던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욥의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닌 까닭에 하나님을 법정에 세울 수 없음을 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더더욱 답답하고 억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사람에게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분인 동시에 감추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시는 대단히 익숙하고 친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은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대단히 낯익은 분이시며 동시에 사람이 알 수 없는 낯선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요일4: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거룩하고 공의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대단히 익숙하고 친숙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날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살피시며,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산성이 되어주시고 요새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들어왔던 낯익고 익숙한 하나님의 모습이며 동시에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런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는 않으십니다. 욥의 경우처럼, 아무리 간절히 부르짖어도 도무지 우리의 절규를 들으시는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갖은 노력을 다해도,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경우도 너무나 많으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게 빽빽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낯선 하나님인 경우가 많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물론 이전의 욥 역시 자신들이 배우고 경험하였던 낯익은 익숙한 하나님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도무지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과 고난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익숙하고 낯익은 하나님으로는 도무지 자신이 겪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욥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낯익은 하나님과는 너무나 다른 낯선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서 욥은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욥의 처지에서는 너무나 답답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사람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자신들이 알고 있던 낯익은 하나님만으로 욥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였던 욥의 친구들은 매우 문제가 많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낯선 하나님을 만나 당혹해하며 하나님을 향해 탄식과 절규를 늘어놓는 욥의 모습은 불경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낯선 하나님에 대해 알려는 절실하고 절박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기 10장 말씀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낯익은 하나님이 아닌 낯선 하나님에 대한 욥의 탄식과 절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낯익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알고 있던 이전의 욥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들을 욥이 늘어놓습니다.


10:3 주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


10:8 주께서 손수 나를 빚으시고 지으셨는데, 어찌하여 이제와서, 나에게 등을 돌리시고,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십니까?


10:12-13 주께서 저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시고, 나를 돌보셔서, 내 숨결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주께서는 늘 나를 해치실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묻는 것들이 너무나 거칠고 험해서 낯익은 하나님만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불경스럽게만 보입니다. 과연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일 것입니다. 낯선 하나님에 대한 욥의 한탄과 절규는 도대체 왜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느냐는 원망으로까지 발전합니다.


10:18 주께서 저를 이렇게 할 것이라면 왜 나를 모태에서 살아 나오게 하셨습니까? 차라리 모태에서 죽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나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따지고 드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 도대체 이럴 거면 왜 나를 나았느냐따지며 묻는 것처럼 욥은 왜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는 이토록 자신을 힘들게 하냐며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이제 욥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오직 한가지 뿐입니다.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제발 자신을 그냥 좀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10:20 내가 살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를 좀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게 남은 이 기간만이라도, 내가 잠시라도 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욥기 10장에서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대단히 거친 말로 한탄하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욥의 한탄과 하소연을 읽다 보면 한편으로 연민과 긍휼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께 저토록 거칠고 불경스럽게 말해도 되나 싶어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욥기 10장에 나오는 욥의 한탄을 읽으며 어떤 마음이 더 많으셨는지요? 우리 가운데 욥과 똑같은 형편에 놓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욥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다수 교인이 욥기를 불편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욥기를 불편하게 여기는 진짜 이유는 누구도 욥과 같은 삶을 살고 싶지도 않고 이런 운명에 놓이고 싶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기를 읽으면서도 좀처럼 욥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신앙적인 연대감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욥기를 읽어도 은혜가 되기보다는 짜증이 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욥기를 읽고 배우고 묵상해야 하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어떤 고통이나 고난이든 우리를 빗겨 가기를 소망하며 신앙 생활합니다. 저는 이런 소망과 기도가 이기적이거나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소망이나 기대와는 다르게 누구라도 원치 않는 재앙이나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라도 그 원인이나 이유를 찾기 힘든 고통이나 고난을 겪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실존입니다. 다행히 나에게는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욥기는 반드시 읽고 배워야 하는 성경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욥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너무나 알고 있던 낯익은 하나님이 아닌 낯선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말씀입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난에 대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낯익은 하나님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내가 알고 있는 낯익은 하나님으로는 인생에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하는 숱한 일들을 제대로 대처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습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의 결정적인 실수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낯익은 하나님으로만 욥이 겪는 고통을 함부로 제멋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이 아님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낯익은 하나님을 내세워 하나님 노릇을 한 것입니다.


반면에 대단히 거친 말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묻는 욥의 태도는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가져야 하는 신앙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불경스러워 보이는 욥의 모습은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신앙의 바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전에 몰랐던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경우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낯익은 하나님을 절대시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신앙의 강화라고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신앙의 강화라고 합니다. 속으로는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믿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는 끊임없이 믿습니다!”를 남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도전은 낯익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강화가 아닙니다. 이전에는 도무지 생각지도 않았던 낯선 하나님에 대해 알게 하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의 심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욥기는 낯익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강화를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낯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심화를 배우도록 돕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별다른 문제 없이 평탄하고 순탄한 삶을 살아갈 때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낯익은 하나님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거나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된다면 이제까지 알던 낯익은 하나님으로는 절대로 당면한 문제를 감당하거나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욥기가 가르쳐 주는 낯선 하나님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낯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이전보다 더 성숙하고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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