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욥기11-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 수 있느냐?

욥기 11:1-20

 

욥기 강해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 수 있느냐?”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욥의 세 번째 친구였던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을 정죄하고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욥기의 주요 내용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가 욥과 신앙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의 원인과 그 이유에 관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세 친구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믿는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욥에게 제시합니다.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에 대한 세 친구의 공통된 주장이 무엇입니까?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와 원인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세 친구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의 원인은 그가 하나님께 지은 죄였습니다. 세 친구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리시는 벌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세 친구의 주장과 제안을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이런 재앙과 고난을 겪을 만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 친구의 정죄에 대해 끝까지 자신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주장합니다.


욥기는 욥의 세 친구와 욥이 번갈아 가며 자신들의 주장을 앞세우며 논쟁을 벌입니다. 이러기를 총 세 번을 번갈아 가며 반복합니다. 세 친구와의 논쟁이 끝나면 엘리후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세 친구와는 조금은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욥은 엘리후의 주장조차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욥기는 얼핏 읽으면 욥과 욥의 친구들이 서로 누가 옳다 그르다 논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욥기는 욥의 주장이 옳으냐 세 친구의 주장이 옳으냐가 아닙니다. 욥을 정죄하고 책망하는 세 친구의 주장이 대단히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마냥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 친구에 대해 반론을 펴는 욥의 주장이 옳은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욥기를 읽으며 욥의 주장이 옳으냐, 친구들의 주장이 옳으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욥기는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르냐를 보여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욥기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인가?”입니다. 세 친구의 결정적인 문제는 자신들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다 안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해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하나님은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욥을 함부로 정죄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그렇다고 욥이 옳다는 것 또한 아닙니다. 욥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대해 매우 심각한 오해를 하였습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재앙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는 태도가 대단히 신실한 믿음의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신실한 믿음이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자칫 자신의 책임이나 사람의 책임 또는 세상의 책임마저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려버릴 수 있는 매우 위험한 믿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의 주장을 옳다고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 보다 욥의 믿음이 낫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욥이 세 친구보다 나은 신앙의 태도가 있다면 욥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욥과 논쟁을 펼치는 소발의 주장 역시 말 자체만 본다면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대단히 은혜롭게 들립니다. 다른 친구들의 주장처럼 소발의 주장 우리에게 대단히 익숙한 신앙의 교훈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리는 소발의 주장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욥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상황이나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내가 듣기에 좋은 말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는 것은 매우 심각한 신앙의 오류입니다. 이것은 욥기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성경 읽기의 원리입니다. 아무리 내가 듣기에 아름답고 은혜로운 말이라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왜 그런 말을 했는지에 따라 똑같은 말도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소발이 욥에게 하는 충고와 권면은 나쁜 의도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욥이 겪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 전통을 기준으로 욥의 겪는 재앙과 고난을 판단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특별한 상황과 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읽고 적용할 때는 가장 먼저 성경이 기록된 상황과 시대와 장소와 사람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발은 계속되는 욥의 탄식을 듣고도 욥이 겪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말로 탄식과 하소연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화가 났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소발은 타인의 고통이나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면 제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도 오히려 그 똑똑하고 능력 많은 것이 문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소발은 욥이 겪고 있는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고통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성급하게 자기가 알고 있는 신앙 전통에 따라서 자신의 친구 욥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소발이 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욥이 친구들의 권면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소발은 욥이 친구들의 권면을 비웃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권면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동의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욥은 친구들의 말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죄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말을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발은 욥의 이런 태도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11:3 네가 혼자서 큰소리로 떠든다고 해서, 우리가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우리를 비웃는데도, 너를 책망할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둘째는 욥이 자신의 무고함, 죄가 없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소발은 비참하고 처참한 재앙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주장하는 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재앙과 고난이 끝나고 새날을 볼 수 있을 텐데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욥이 너무나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11:4 너는 네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주님 보시기에, 네가 흠이 없다고 우기지만,


소발은 끝까지 자신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주장하는 욥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앞세워 욥을 책망합니다.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라는 소발의 주장은 욥기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발은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했습니다. 전능자라는 표현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7 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아낼 수 있느냐?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다 측량할 수 있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대부분 교인은 전능하신 하나님 하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는 이런 의미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전능자로 고백하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 대부분은 사람이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면 놀라워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위대하고 어마어마한 사건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의미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흘러갑니다. 사람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결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성육신을 가장 중요한 교리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대표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신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몸소 십자가 달려 죽임당하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소발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만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발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전통적 의미의 전능하심으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을 잘 나타내는 말씀이 욥기 1110절과 11절의 말씀입니다.


11:10-11 하나님이 두루 지나다니시며, 죄인마다 쇠고랑을 채우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잘못하는지를 분명히 아시고, 악을 보시면 곧바로 분간하신다.


욥은 10장에서 도대체 왜 세상에는 무죄한 자가 고난받고 악한 자가 잘 되는 일들이 벌어지냐며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여기에 대해 소발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허망한 사람이나 악한 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주장합니다. 소발은 주장은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소발의 주장에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교묘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소발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엘리바스와 빌닷 역시 비슷한 문제를 보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옳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욥을 정죄하고 책망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왜곡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욥에게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느냐고 책망하면서 막상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함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읽은 글입니다. '가짜 휘발유를 만들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재료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답은 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진짜 휘발유'였습니다. 가짜 휘발유를 만든다고 휘발유보다 물을 더 많이 넣으면 대번에 티가 나고 말겠지요.


아무리 가짜를 만들어도 가짜를 진짜같이 만들기 위해서 가장 많이 넣어야 하는 것은 진짜입니다. 기가 막힌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진짜가 많다 해도 그 안에 조금이라도 가짜가 섞여 있으면 전체가 가짜가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진짜를 가짜로 만드는 것은 '지극히 적은 양의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양의 진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이고 있는 아주 적은 양의 가짜 말씀입니다. 입니다. 새빨간 거짓말만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정직하지 못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거짓말입니다.


욥을 향한 소발의 마지막 권면은 빌닷의 권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 너는 하나님께 지은 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네가 마음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 고통은 물러가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발의 주장은 얼핏 틀린 말을 찾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것은 소발만이 아니라 빌닷이나 엘리바스의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말이 대단히 그럴듯하게 포장이 되어 있으나 두 가지 점에서 소발의 이야기는 매우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은 물론이고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선 소발을 비롯한 욥의 세 친구는 욥의 고통을 실제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이것은 인격이 나쁘거나 마음이 거칠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은 정신적 문제나 잘못된 교육 때문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을 직접 눈을 보고서도 욥의 세 친구가 욥의 고난에 공감하지 못했던 결정적 이유는 다릅니다. 저들이 욥의 고난에 공감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은 의로운 사람이고 욥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이런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항상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조금이라도 잘못한 사람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자기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입니다. 너무 자기 믿음, 자기 의에 매여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공감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소발의 주장에 담긴 또 다른 오류(잘못)는 하나님을 자신이 가진 믿음, 신념, 신앙의 틀 안에 가두어 둔다는 것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사람이 어떻게 다 알 수 있냐며 욥을 책망했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사람이 알 수 없다며 욥을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마치 하나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견해에 제한시키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가장 먼저 낮의 자의 모습으로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 비난을 공감해 주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과 용서와 관용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다른 이들이 예상하지 못한 존귀한 삶을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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