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는 엘리후
욥기 32:1-3
욥기 강해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화내는 엘리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욥과 그의 세 친구가 오랫동안 벌여왔던 신학 논쟁에 참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로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욥기는 전체가 총 42장으로 되어있습니다. 욥기 42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욥과 그의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와 벌이는 논쟁입니다. 욥과 세 친구와의 논쟁은 총 세 차례에 걸쳐 반복됩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욥과 세 친구가 벌인 첫 번째 논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욥과 세 친구가 벌인 두 번째 논쟁과 세 번째 논쟁은 각자의 주장을 조금씩 발전시켜가며 논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두 번째 논쟁과 세 번째 논쟁을 통해서도 각자의 주장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논쟁이 계속될수록 각자의 주장만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세 차례 걸쳐 반복되는 논쟁을 통해서도 자신은 이런 고통과 고난을 겪을 만한 죄가 없다는 욥의 주장과 생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욥 역시 자신의 무고함을 반복하여 주장했음에도 세 친구의 주장과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생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주장이나 생각을 알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서 논쟁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과 세 친구의 계속되는 논쟁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논쟁을 통해서는 결코 상대방의 주장이나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논쟁하다 보면 논쟁에서 이길 수도 있고 지는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논쟁에서 이겼다고 그 사람의 주장이나 생각이 옳은 것이고, 논쟁에서 졌다고 그 사람의 주장이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논쟁에서 졌을 뿐이지, 이것으로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욥과 세 친구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평행선과 같은 논쟁을 계속하는 것을 참다못한 한 사람이 논쟁에 끼어듭니다. 욥기는 이 사람에 대해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라고 소개합니다. 새로 등장한 엘리후는 욥과 욥의 세 친구 모두에게 화를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욥32:2-3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라는 사람이 욥에게 화를 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부당하다고 여기며 끝까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엘리후가 욥과 논쟁했던 세 친구에 대해 화가 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욥의 세 친구가 잘못된 주장을 펼치는 욥에 대해 제대로 된 논리로 정죄하지 못하고 오히려 욥의 질문에 변변찮은 답을 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욥기를 이끌고 가는 메인 주제가 무엇입니까? 인생의 고난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별히 무죄한 자의 재앙과 고난에 대한 문제입니다. 마땅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엄청난 재앙과 고난을 겪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을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예기치 못한 고난의 문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욥의 핵심 주제입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던 세 명의 친구가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을 직접 보고는 그가 겪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공통으로 주장한 것이 무엇입니까? 욥의 세 친구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을 보고는 욥은 큰 죄를 지었음이 분명하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잘한 사람을 복을 주시고, 잘못한 사람은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 욥은 어떤 반론을 펼쳤습니까? 욥은 친구들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욥 역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욥이 절대로 용납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자신이 겪는 고통과 고난이 모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는 것이 친구들의 주장입니다. 반면에 욥은 자신에게는 이토록 비참하고 극심한 재앙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 죄가 없다는 것을 처절할 정도로 붙들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아내는 물론 마을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에게 완전히 따돌림당하며 궁지에 몰렸습니다. 욥은 자신의 상황을 ‘이럴 바에야 차라리 스올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라고 할 정도로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무고함과 무죄함을 인정해 주거나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토록 비참한 재앙과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의 모습이 친구들이 보기에 너무나 뻔뻔스럽게 보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무엇입니까? 재앙이나 극심한 인생의 고통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세 친구의 권면대로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렇게 했으면 간단했을 것입니다. 그럼 누구나 ‘저 사람 회개했구나.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실 거야.’라고 격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엘리후는 그토록 비참한 고통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에 대해 무척이나 화가 났습니다. 동시에 엉뚱한 주장을 늘어놓고 있는 욥을 제압하지 못하고 더는 제대로 된 대꾸도 못 하는 욥의 세 친구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습니다.
욥과 세 친구 모두에게 화를 내면 욥기에 등장하는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엘리후는 욥기의 등장하는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히브리식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욥과 세 친구의 계속되는 논쟁에 새롭게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엘리후이고 그 이름이 히브리식 이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욥과 논쟁을 펼치며 내세웠던 상선벌악이나 인과응보 또는 결과주의는 대단히 보편적이며 도덕적인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교나 기독교 신앙만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 문화권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종교마다 조금씩 주장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도, 유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소위 정상적인 종교라고 한다면 이런 것은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런 것들을 믿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사실 이런 것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발견할 수 있는 도덕률입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지금까지 욥과 논쟁했던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는 전혀 다른 주장을 가지고 욥을 책망합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엘리후의 주장을 자세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엘리후의 주장은 지금까지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 그리고 소발의 내세웠던 주장보다는 훨씬 더 성경만의 독창적인 가르침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후의 이름을 유일하게 히브리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주장을 요약하면, 인간이 겪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신앙을 한층 더 굳건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교육적인 훈련이라는 것이 그의 입장입니다. 욥기에는 엘리후의 주장이 욥기 32장부터 37장까지 총 여섯 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섯 장에 걸친 엘리후의 주장은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32장과 33장은 고난은 하나님의 영적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34장은 고난은 영적 훈련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35장은 영적 훈련의 목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을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36장과 37장은 따라서 우리가 고난받을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엘리후가 펼칠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얼핏 보기에 네 단락의 주제만 봐도 굉장히 은혜롭고 대단히 신실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신앙 생활하며 이런 주장의 설교를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가운데 꽤 많은 교인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신앙생활 할 것입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야. 잘 참고 인내하면 이길 수 있으니까 참고 기다리면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게 엘리후의 전형적인 주장이며 논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잘못된 주장이 아닙니다. 분명 성경의 가르침이며 옳은 가르침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엘리후의 이런 주장만으로는 욥이 당한 고난과 재앙이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됩니다. 욥기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많은 교인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힘들어합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요. 좀 쉽고 간단하게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은 없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쉽고 간단하게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없습니다. 자신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고 설교하는 목사는 100% 삯꾼 목사입니다.
너무나 당연히 옳은 엘리후의 주장 또한 욥이 겪는 고통과 고난의 상황에서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한다고 하면 많은 분이 당혹스러워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믿으며 신앙 생활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정답을 알고서 그 정답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오히려 정답처럼 여겨지는 것을 붙잡고 사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제발 부탁인데 성경을 통해서 인생의 정답을 얻으려고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통해 인생의 답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신앙 행적과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선조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 고백이 곧 하나님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저것이 달이라고 하는데, 손가락만 보면서 손가락이 달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 사이에 있었던 모든 논쟁을 지켜보고는 어떻게 했습니까? 욥과 세 친구 모두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욥에게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 때문에 화를 내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에게는 욥을 제대로 정죄하지 못하고 욥의 질문에 변변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하며 화를 낸 것입니다.
엘리후가 욥과 세 친구 모두에게 화를 낸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도 틀렸고 세 친구 틀렸다는 것입니다. 둘 다 틀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만 옳다는 것입니다. 물론 욥도 틀렸고 욥의 세 친구도 틀렸습니다. 그렇다면 엘리후의 주장은 옳은 것이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후가 이들보다 더 그럴듯한 주장을 펼치는 것 같지만 그 역시 옳은 주장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고 분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종교가 아닙니다.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은 평생을 걸쳐 진리를 추구하며 찾아가는 것이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불변의 진리라고 확신하며 그것을 붙잡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대부분은 옳은 것을 추구하며 살기보다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를 가리자고만 합니다. 누구 말이 맞고 누구 말이 틀리느냐만 따지려고만 합니다. 내 마음이 시원하도록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따져서 내 기준에 맞추려고 자꾸만 다그칩니다. 엘리후의 모습이 이런 신앙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과 주장인 인생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유일한 내 삶의 기준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이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왜곡합니다. 엘리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의는 옳고 그른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옳고 그른 것을 함부로 나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요15:1-4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인 우리가 포도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근사하고 멋진 가지처럼 보인다고 해도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만을 따지려고 했던 엘리후는 이런 점에서 크게 빗나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항상 옳은 주장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한 점 흠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용서하며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들고, 이해되지 않는 사람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