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욥기13-맞지만 동의할 수 없는 엘리후의 주장

맞지만 동의할 수 없는 엘리후의 주장

욥기 33:1-33

 

욥기 강해 열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맞지만 동의할 수 없는 엘리후의 주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나누는 말씀은 욥과 세 친구의 논쟁에 새롭게 등장한 엘리후의 첫 번째 주장입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세미하고 부드러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기 3장부터 31장까지는 욥과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가 욥이 겪는 고난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 세 차례에 걸친 신앙 논쟁을 벌이는 말씀입니다. 욥이 겪는 비극적이며 비참한 재앙과 고난에 대한 세 친구의 공통된 주장이 무엇입니까?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에는 분명한 원인과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재앙과 고난의 결정적 원인은 욥이 지은 죄라는 것이 세 친구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반드시 악을 벌하고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 친구의 주장에 따르면 인생이 살면서 겪게 되는 재앙이나 질병 또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기 위해 내리는 벌입니다.


지난주에도 설교했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이기보다는 거의 모든 종교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극히 보편적인 도덕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상선벌악이나, 사람이 행한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는 대부분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심지어 종교가 없는 대다수 사람도 추구하는 대단히 도덕적인 가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비록 상선벌악이나 인과응보가 대단히 도덕인 가치임에는 틀림이 없습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가치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상선벌악이나 인과응보와 같은 도덕법칙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대단히 이상적인 가치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다고 할 때도 이상적인 가치로 여겨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선벌악 또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상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기준이 어떠하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상보다는 벌 받아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벌 받을 것은 하나도 없고 상 받을 것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에 대해 가르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중심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비록 성경에 나오는 최고의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은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게 심판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 때문에 우리는 심판 받아 멸망하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내세우는 상선벌악이나 인과응보의 도덕법칙이 대단히 매력적이고 이상적인 가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남에게 적용할 때만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도덕적인 법칙이기보다는 매우 잔인한 법칙이 될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선벌악이나 인과응보의 도덕법칙이 아닙니다.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상선벌악, 인과응보와 같은 인류가 가진 보편적인 지혜와 도덕을 가지고 욥이 겪는 고난을 설명하고 정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욥을 이해시키지 못했습니다. 욥은 끝까지 자신의 무죄함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이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욥과 세 친구가 세 차례에 걸친 논쟁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라겔의 아들이라고 하는 엘리후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욥에게 화를 냅니다. 또한, 끝까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을 제압하지 못하는 욥의 세 친구에게도 화를 내며 이들의 논쟁에 끼어듭니다.


32:2-3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욥과 세 친구의 논쟁에 끼어든 엘리후의 주장은 32장에서부터 시작하여 37장까지 네 번에 걸쳐 길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욥은 엘리후의 일장 연설을 듣고도 여전히 자기가 겪는 고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합니다. 욥의 세 친구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엘리후의 주장도 욥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엘리후의 등장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과 그의 세 친구가 벌인 논쟁이 고난에 대한 해결책과 답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기는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을 통해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재앙이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편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막상 욥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엘리후의 주장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겪는 재앙이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편견을 깨닫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함입니다.


욥을 찾은 세 친구 가운데 엘리바스는 남쪽에서 왔고, 빌닷은 동쪽에서 왔으며, 소발은 북쪽에서 왔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들이 내세우는 주장이 세상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단히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지혜이며 도덕임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새롭게 논쟁에 끼어든 엘리후의 이름이 욥기에서는 유일하게 히브리식 이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엘리후의 주장은 구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이며 지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엘리후가 내세운 주장은 지금까지 세 친구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주장이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겪는 고난의 원인과 이유에만 집착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엘리후는 고난의 목적에 초점을 두고 욥이 겪는 고난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주장 역시 욥이 겪는 고난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욥기가 엘리후의 주장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고난에 대해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나 문제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엘리후는 욥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책망할 때도 차마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책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비록 자신들이 말이 욥을 향한 책망이지만 에둘러 말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욥의 이름을 부르면 아주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습니다.


33:1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욥기 33장에 기록된 엘리후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8절에서 12절의 말씀입니다. 엘리후는 먼저 욥이 내세운 주장을 요약하며 그의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엘리후는 세 친구보다는 훨씬 논리적이며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욥에게 욥의 친구들처럼 막무가내로 네가 잘못했으니까 무조건 네가 회개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한 말을 인용하면서 당신이 말한 이 부분은 이런 것이 문제야.’라고 확실하게 짚어가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했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33:8-11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엘리후는 이런 욥의 주장이 의롭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왜 욥의 말이 의롭지 못하다고 한 것일까요?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서 사람보다 크다는 사실을 놓쳤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가 이해 못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잘못했다고 하면 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뜻합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욥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33:12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겪는 재앙과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며 책망합니다. 엘리후의 주장이 얼핏 대단히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이 사람보다 크다는 그의 주장은 물론 틀림이 없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욥에 대해 엘리후는 매우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욥이 끝까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런 죄가 없음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선 자신도 죄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겪는 재앙과 고통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는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서 욥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엘리후의 주장은 13절에서 22절까지 말씀입니다. 13절에 나와 있듯이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해 아무런 답도 주시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이에 대한 엘리후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어서 듣지 못하는 거라고 책망합니다.


33:13-14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엘리후는 두 가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는 꿈과 환상입니다.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쁜 행실을 버리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주시는 경고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겪는 육체의 질병입니다. 엘리후는 육체의 질병이야말로 인간의 잘못을 벌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후의 주장은 많은 교인이 흔히 가지고 있는 생각이며 믿음입니다.


33:15-17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33:19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마지막 세 번째는 23절에서 30절까지로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를 잘 받아들인 사람의 삶은 다시 회복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엘리후가 내세우고 있는 인간의 고난에 대한 그의 핵심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엘리후는 인간이 겪는 재앙과 고난, 불행에 대해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교육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33:28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33:30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


고통과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어왔을 것입니다. 물론 저도 이런 관점에서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자신이 겪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창조적 고통 혹은 건설적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엘리후의 이런 주장에 욥은 선선히 동의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엘리후의 주장을 욥의 상황과 분리하여 생각한다면 분명 지당하고, 틀림이 없는 주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맞는 엘리후의 주장이라도 욥의 경우에 적용하려고 하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 됩니다. 엘리후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동의할 수는 없는 거예요.


이것은 욥의 세 친구가 범했던 실수를 엘리후 역시 똑같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분명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주장은 욥의 세 친구보다는 훨씬 진일보한 가르침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엘리후의 주장을 욥의 상황에 그래도 적용하는 데에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가진 신앙 기준으로만 타인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자신이 주장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이 겪는 고난이나 고통에 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영적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배워야 하는 영성은 더 많이 용서하고 더 많이 품어주고 더 많이 이해하는 것이지 자신의 잣대로 다른 이의 잘못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믿음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품어줄 수 있는 용서와 사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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