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고난, 악인의 형통
욥기 34:1-37
욥기 강해 열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의인의 고난, 악인의 형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나누는 말씀은 엘리후의 두 번째 주장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세미하고 부드러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우리 교회 성도님 한 분이 헌금을 가지고 저의 집에 오셨습니다. 헌금을 준비하여 교회에 갔는데 깜빡 잊고 예배 시간에 미처 헌금을 드리지 못했다며 저의 집으로 직접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놓고 간 헌금 봉투에는 10월 헌금이라는 글과 헌금 액수가 쓰여 있었습니다. 한 달 치 헌금이니 그 액수가 꽤 됐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그분이 놓고 간 헌금 봉투를 저에게 건네주며 속상해하는 것입니다. 그 집 형편을 잘 아는 아내는 그분이 놓고 가신 헌금 액수면 몇 년째 바꾸지 못하고 있는 고장 난 부엌 가전을 진작에 바꿀 수 있을 텐데 하며 속상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속상해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는 오히려 내심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헌금을 드렸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는 예배 시간에 별도의 헌금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드려진 헌금에 대해 별도로 축복하는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 성도님들 가운데 이것을 가지고 목사에게 불평하거나 섭섭하게 여기는 교인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교회를 다녀가신 저의 어머니께서 지금도 가끔씩 헌금을 위해 축복기도를 꼭 하라고 재촉하십니다.
생각보다 많은 교인이 헌금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합니다. 헌금을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물질의 복을 받는 수단이나 통로쯤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생각이나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매우 심각한 신성모독이라고 여깁니다. 얼핏 힘에 부치는 헌금을 하면, 더 큰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것이 말은 대단히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도박판에서 돈 놓고 돈 먹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예전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서 어떤 분이 십일조로 천 불을 헌금하면서 헌금 봉투에 쓴 기도 제목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분이 헌금 봉투에 쓴 기도 제목은 십일조 만 불하는 교인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대단한 믿음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십일조를 하면서 이런 식의 기도 제목을 앞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십일조나 헌금은 이전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금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에 대한 탐심을 다스리며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헌금은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는 수단이 아닙니다. 돈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의 주인 되심을 깨닫게 하는 수단이며 방법입니다.
제가 성도님의 헌금 봉투를 받아들고 마음 아파하는 아내와는 달리 내심 기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분이 당장이라도 바꿔야 할 가전제품을 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아껴 쓰면서 그것을 사고도 남는 금액을 매달 헌금하실 수 있었던 것은 헌금을 통해 돈에 대한 욕심을 잘 다스리는 존귀한 삶을 사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대부분 교인이 이런 마음과 태도로 헌금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음 아파해야 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입니다.
헌금은 절대로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넘치도록 과하게 해서 정상적인 경제생활이 어려워질 정도로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헌금을 하면서 자신의 경제 수준이나 능력에 턱없이 부족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무런 부담되지 않는 정도를 헌금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는 결코 돈에 대한 탐심을 다스리는 훈련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헌금하며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대부분은 마치 수학 공식처럼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진짜 속내는 지금보다 더 잘 사기 위해 즉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함일 것입니다. 또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저주나 벌을 피하고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닙니다.
이런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복신앙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신앙의 이유입니다. 저는 더 많은 복을 받기를 원하며, 인생의 재앙이나 화를 피하려고 하는 기복신앙이 나쁘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것이 과연 기독교 신앙을 통해 얻거나 누릴 수 있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 잘 믿는 사람은 늘 형통하고 늘 행복하고 늘 건강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정말 그렇던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따르기도 하고, 사업이 실패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예상치 못한 재앙이나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남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 심각한 죄를 지었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을 보고 그를 정죄하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욥이 남들이 모르는 심각한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 이런 고통을 겪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예수를 믿지 않지만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로 사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기에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로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심지어 악한 사람일수록 어려움을 당하기는커녕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교인 중에는 불의한 세상의 현실을 보고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한탄하고 항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당한 재앙을 겪고 무고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욥이 가졌던 의문입니다. 욥기는 불의하고 부당한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 질병이 닥치고 고난이 닥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음에도 고통과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반대로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심지어 악한 일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도대체 전능하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수천 년을 이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의 의문입니다. 욥기는 수천 년 동안 우리를 괴롭혀 오고 있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세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여기에 대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셨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욥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열 자식과 전 재산을 잃는 엄청난 재앙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자기 자신도 온몸에 난 종기로 심각한 육체의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아내는 물론이고 자신의 절친조차도 욥이 겪는 고통을 공감해주거나 이해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의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던 세 친구는 이 모든 재앙과 고통이 욥이 지은 죄 때문이라며 욥을 정죄하였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등장한 엘리후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욥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향해 공연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고 욥을 비난합니다.
욥의 세 친구가 끝까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의 하소연에도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해 욥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여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이것은 나중에 등장한 엘리후 역시 욥의 세 친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후의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 주는 말씀이 욥기 34장 10절로 12절의 말씀입니다.
욥34:10-11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기에 결코 악이나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살면서 행한 일에 따라 조금의 불공평함도 없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그대로 갚아주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이러한 엘리후의 믿음은 욥의 세 친구가 가졌던 믿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과응보의 믿음입니다.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욥의 말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믿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그래서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죄도 없는 욥에게 그토록 엄청난 재앙과 고통을 주실 리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행한 대로, 상을 주시거나 심판하신다는 믿음은 욥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욥 역시 엘리후처럼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고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만약 욥이 하나님을 아무런 원칙도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믿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토록 끈질기게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해 그토록 처절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 역시 하나님을 엘리후처럼 악을 행하지도 불의를 행하지도 않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욥은 더더욱 자신이 겪고 있는 재앙과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원망과 불평은 자신이 믿어왔던 하나님의 공의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이며 불평입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보여 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사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기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도 불의를 행하지도 않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공의로우시고 불의를 행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린다는 이 세상에 무고한 자가 고난을 겪고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시편 73편은 아삽이란 사람이 쓴 시입니다. 아삽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찬양대를 책임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실하고 정직했던 아삽이 본 세상은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경험한 현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자신이 본 현실이 자신의 믿음과는 너무나 달라 실족하여 넘어질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시73:1-2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그가 경험한 현실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악인의 형통함이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이 무엇입니까? 악한 사람들, 불의한 사람들, 거짓된 사람들이 건강하게 그리고 부자로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을 때조차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괴로워하며 죽기는커녕 너무나 편하게 죽습니다. 저들의 인생에는 재앙도 없고, 소원에 넘치도록 소득도 얻고, 교만하기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편안하고 재물은 넘쳐나는 것이었습니다.
시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이것은 단지 아삽만 보고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도 여전히 보고 있으며 경험하고 있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것은 세상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모든 사람에게 존경할 만한 목사님으로 인정받는 분이 두 분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평생 나병 환자를 돌보시며 일생을 마치셨던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셨던 목사님이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님으로 49세의 젊은 나이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하신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을 오히려 소속 교단은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목숨을 잃기까지 신앙을 지켰던 주기철 목사님을 왜 목사들이 이단으로 정죄했는지 아십니까? 다른 목사들은 다 하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사람의 무고한 고통과 악인의 형통함!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강력한 계략입니다. 욥은 물론이고 욥의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는 욥이 왜 그토록 극심한 재앙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욥이 왜 이런 재앙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도 의롭다 인정하시는 욥을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계략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겪고, 불의한 사람이 형통하게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욥의 세 친구의 주장처럼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고난에는 우리의 잘못이나 죄 때문에 겪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엘리후의 주장처럼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넘어뜨리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사탄이나 세상이 주는 재앙이나 고통도 있습니다.
이것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가진 신앙 기준으로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이나 고난을 함부로 말하는 실수를 피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겪는 재앙이나 고통이 무고한 것이라면, 내가 겪는 고난 때문에 실족하지 않고 견디어 내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자신이 겪는 고난을 바르게 분별하는 영성으로 고난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