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욥기 35:1-16
욥기 강해 열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나누는 말씀은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세 번째 주장입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욥기의 주된 내용은 욥이 자신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벌이는 신앙 논쟁입니다. 욥과 그의 세 친구는 욥이 겪고 있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원인과 이유에 대해 욥과 논쟁을 펼칩니다. 욥은 자신이 왜 이런 재앙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며 하나님께 하소연과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반면에 욥의 세 친구는 행한 대로 갚으시고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일종의 상선벌악 또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가지고 욥을 정죄합니다. 세 친구는 욥이 그토록 비참하고 비극적인 재앙과 고통을 겪는 이유를 욥에게 감추어 둔 심각한 죄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욥의 세 친구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 그가 저지를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세 친구는 왜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만 보고 이것을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여긴 것입니까? 이들에게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전능자이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전지자이시며 동시에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며 동시에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부당하거나 불의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전능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앙과 고통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한 심판임이 틀림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보여준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반복하여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욥의 세 친구가 가졌던 신학과 신앙에는 매우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죄나 실수에 대해 즉각적으로 벌주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신가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죄를 벌주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답답할 정도로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의 원인과 이유를 두고 욥과 세 친구가 벌이는 신앙 논쟁에 엘리후라는 새로운 인물이 끼어듭니다. 새롭게 등장한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와는 조금은 다른 색다른 주장을 내세웁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인생의 고난은 사람을 연단하고 훈련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며 시험을 견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세 친구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엘리후의 주장 역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엘리후의 주장을 욥의 상황과는 상관없는 일반적인 주장이라고 하면 딱히 틀렸다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주장을 욥의 상황에 적용하게 되면 그의 주장 역시 세 친구의 주장처럼 욥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욥기에는 엘리후의 주장에 대해 욥이 반론을 펼치는 내용은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욥이 엘리후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인정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엘리후의 주장에 대해 욥의 반론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엘리후의 주장이 비록 대단히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그의 주장을 욥의 겪고 있는 고난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엘리후의 주장은 그의 세 번째 연설입니다. 엘리후는 그의 세 번째 연설에서 매우 흥미롭고도 중요한 두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선한 행동이나 악한 행동이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주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세 친구와 논쟁에서 했던 주장들을 물고 늘어집니다. 욥기 35장 2절과 3절은 엘리후가 말하고 있는 욥의 주장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엘리후가 들은 욥의 주장은 이렇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당신은 자신의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며 한탄했는데 과연 이런 말을 옳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욥35:2-3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엘리후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욥은 세 친구와 논쟁을 하며 만양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한들 이것이 하나님께 무슨 해라도 된다고 자신에게 이렇게 가혹한 재앙과 고통을 내리시냐며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더 나아가 욥은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고 똑같이 심판하신다며 항의했습니다.
욥7: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욥9: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욥의 항변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대로 갚아주시지 않는 불만과 원망이 스며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처럼 의롭게 사는 사람은 고통을 받지 말아야 하며, 불의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욥은 자신을 인과응보의 원리로 정죄하는 세 친구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욥 역시 인과응보의 논리에 얽매여 세상을 보고 있던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살아온 자신은 비참하고 비극적인 재앙과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평생 자기 탐욕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은 아무런 재앙이나 고통도 없이 너무나 행복하게 잘만 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의 현실을 보니 의롭게 살려고 애쓰며 살아 온 것이 아무런 유익도 없다는 욥의 원망과 한탄입니다.
욥이 가졌던 원망과 한탄은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게 되는 의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믿음을 지키며 남들보다 더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일수록 이런 의문을 가질 때 많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자신은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재난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하지만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오히려 하는 일마다 성공하고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재앙과 고통으로 인해 냉소와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엘리후가 주장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엘리후는 욥과 그의 세 친구 모두에게 말합니다. 엘리후는 뜬금없이 구름을 보라고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하늘 높이 떠 있는 구름을 보라고 합니다.
욥35:4-5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엘리후는 왜 욥과 세 친구에게 왜 구름을 쳐다보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땅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구름은 하늘 높이 떠 있기에 우리의 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초연히 흘러간다는 것이지요. 막말로 "개는 짖어라. 기차는 간다." 뭐 이런 말입니다.
엘리후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엘리후는 인간이 행위가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아니면 대단히 사악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인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께 인간의 행위는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35:6-7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무슨 뜻입니까? 비록 욥이 죄를 지었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으며 욥의 죄악이 크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미치겠습니까?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거나, 대단히 의로운 일을 했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보탬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주장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구름이 인간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욥의 선행이나 악행, 정의나 불의가 인간사를 까마득하게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께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주변 사람들에게나 겨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후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이미 엘리바스가 반복하여 욥에게 했던 상투적인 주장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더 위대한, 초월적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아무리 선하고 의롭게 살아도, 반대로 아무리 무거운 죄악을 저지른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께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사람에게 천 년은 하나님께 얼마의 시간과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천 년은 나에게 하루와 같단다. 그러자 사람이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사람에게 천만 달러는 하나님께 얼마의 가치가 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페니 하나도 안 될 것이다. 그러자 사람이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페니 하나만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셨을까요? 하루 있다 주겠다.)
엘리후의 주장이 대단히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엘리후의 주장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럼 정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초월하시는 너무나 크고 위대한 분이시기에 인간의 행동에는 어떤 관심도 없고 아무런 상관도 안 하시는 분이신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좌우되시는 분은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과 행위를 일일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초월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과 행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초월적 존재이기만 하다면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와 역사를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인격적인 사귐을 이루어 가시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인 엘리위젤(Elie Wiesel)이 겪은 이야기입니다. 독일 나치 정권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많은 유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이 교수형에 처해 졌습니다. 한 사람은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소년이었습니다. 교수대의 밧줄이 내려와 목에 감기자 노인은 곧바로 숨이 끊어졌으나 어린 소년은 20여 분 이상 발버둥 치다 죽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수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저마다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정녕 우리를 버리셨고 떠나셨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 엘리 위젤의 마음속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희 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저 교수대에 매달린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렸고, 저 소년과 함께 아파하며 고통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가셨던 십자가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고난받으셨고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무고한 자의 고난을 몸소 함께 받으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엘리후는 두 번째로 욥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이유에 관해 설명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욥의 하소연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침묵하시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주장합니다. 욥이 끝까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교만하기 때문이며 그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모두 헛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35:12-13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기도에 대한 엘리후의 주장 역시 그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욥이 처한 상황에는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은 욥이 악하기 때문이며 욥의 한탄과 하소연은 모두 헛된 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듣지도 돌아보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주장처럼 끝까지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는 욥은 악한 사람일까요? 또한, 도무지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해 한탄과 하소연을 늘어놓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헛된 말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로 고통을 겪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을 들으시고 저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내가 가진 기준에 절대성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예기치 않는 모든 고난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인생을 살면서 겪는 예상치 못한 고난이나 어려움을 통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더 많이 알아가고 배워가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고난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