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욥기16-일어난 사건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일어난 사건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욥기 36:1-37:24

 

욥기 강해 열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일어난 사건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깨달음 그리고 영적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욥기 36장과 37장의 말씀은 욥기 32장부터 시작된 엘리후의 네 번째 주장이자 마지막 부분입니다. 엘리후는 욥과 욥의 세 친구가 세 번에 걸친 논쟁이 끝나자 끝까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욥의 교만을 참을 수 없다며 욥과 세 친구의 대화에 끼어든 사람입니다. 뒤늦게 논쟁에 끼어든 엘리후는 욥뿐만 아니라 욥의 세 친구에게 충고와 교훈을 퍼부었습니다.


엘리후의 주장을 정리하면, 그의 주장은 총 4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주장은 욥기 32장과 33장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한 행실을 버리게 하시고 교만을 막으려고 사람에게 재앙과 고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회복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을 위한 따뜻한 충고와 권면이기보다는 끝까지 자신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주장하는 욥에 대한 가시 돋친 정죄였습니다.


엘리후의 두 번째 주장은 34장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불의한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전능자이시기에 실수도, 사사로움, 오해도 없는 완전한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에게 더는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라고 충고합니다.


엘리후의 세 번째 주장은 35장으로 욥의 간절하고 처절한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아무런 응답이 없는 이유는 오로지 그가 악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교만한 말은 모두 헛된 것이기에 악인이 아무리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다고 해도 결코, 들으시지도 돌아보지도 아니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엘리후의 마지막, 네 번째 주장은 오늘 살펴볼 욥기 36장과 37장의 말씀입니다. 욥기 36장은 지금까지 자신이 내세운 주장들을 반복하여 요약하는 내용입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이루시는 방법은 악한 자는 벌하시고 의인에게는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혹시 의인들이 환난을 받는 경우가 있다면 이것은 그들의 감추어진 악행과 교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합니다.


36: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36:9-10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엘리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형통한 삶을 살아갈 것이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환난이 찾아온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환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며 결국은 그대로 비참하게 죽고 말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36:11-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엘리후의 주장이 얼핏 대단히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이며 오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세상에서 형통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감당해야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의 형통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이었으며 수치와 모욕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감당해야 했던 것은 형통이 아니라 박해와 핍박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감당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의 형통이기 보다는 손해입니다.


그럼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박해와 핍박을 감당하거나 손해를 감당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형통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형통을 가지고 순종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주장입니다.


고후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계속되는 엘리후의 주장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을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징계이며 벌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지은 죄와 교만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에 대해 분노하거나 반항하지 말고 지은 죄를 회개하며 묵묵히 감당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환난에서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36:17-18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그대에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정의가 그대를 잡았나니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


욥기 3626절부터 3724까지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에 관해 설명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구름, , 천둥과 번개, , 남풍, 폭풍, 얼음, , 등등 자연의 신비한 현상을 조목조목 들면서 하나님의 권능과 신비를 강조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욥이 살던 시대에는 사람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신비로만 알았습니다.


엘리후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내세운 의도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우주 만물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 그리고 놀라운 신비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한 마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그 어떤 문제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7:23-24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엘리후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엘리후는 욥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고함과 죄 없음을 주장하는 것을 대단히 어리석은 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재앙과 고난에 대해 부당하다며 하나님께 원망과 하소연을 늘어놓는 욥의 태도를 대단히 불경스러운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엘리후의 네 번에 걸친 모든 주장이 끝이 납니다. 네 번에 걸친 엘리후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환난은 인간의 교만과 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겪을 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벌로 여겨 달게 받으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가 내세우는 여러 주장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욥의 세 친구는 물론이고 엘리후 역시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욥은 세 친구가 내세운 주장은 물론이고 엘리후가 내세운 주장 또한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는 그 많은 논쟁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하지 못한 것일까요?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는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섣불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신앙으로 성급하게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을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다른 이를 정죄하는 수단으로 삼기보다는 고통당하는 자를 공감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방법이어야 하는데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욥기 38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직접 등장하셔서 욥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 명쾌하게 답을 알려주실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욥에게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이 무엇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으십니다.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답을 가르쳐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거의 100여 개에 가까운 질문을 욥에게 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정답을 가르쳐 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8:3-4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하나님께서도 가르쳐주지 않으시는 것을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지혜로 답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내세운 주장이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답인 양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누구의 주장도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도 할 수 없었으며 욥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욥에게 그가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시고 대신 욥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쏟아놓으신 것일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해 이러저러한 설명을 주셨다면 욥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했을까요?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의 원인이나 목적에 관해 설명해 주신다고 해도 사람이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을 다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열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은 아비의 마음을 이해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답을 가르쳐주시는 대신 질문을 하셔서 욥 스스로 자신이 겪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도록 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도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을 알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정답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생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정답을 알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앙에도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정답이 없습니다. 따라서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질문에 답을 찾으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욥기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재앙이나 고난을 통해 배우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재앙이나 고난은 항상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재앙이나 고난을 겪게 되면 사람은 반드시 변하게 됩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저 사람 죽을 때가 됐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죽을 만큼 힘든 일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재앙이나 고난이나 시련이 가져오는 변화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상치 못한 재앙이나 고난으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나쁜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상치 못한 재앙이나 고난으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좋은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예상치 못한 재앙과 고난은 반드시 이 두 가지 변화 중 하나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전보다 더 악하고 독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과 이전보다 더 선하고 나은 사람으로 바꾸는 변화 가운데 어떤 식으로 변화되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이전보다 더 나아지기보다는 비통해하며, 절망하고, 삐뚤어집니다. 대부분 경우 예상치 못한 인생의 재앙이나 고난은 이전보다 더 악하고 독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재앙이나 고난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악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괴물과 싸우다가 스스로 괴물이 된다는 말처럼 인생의 고난은 우리를 이전보다 더 나쁜 길로 이끕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대단히 너그럽고 선했던 사람이라도 계속되는 인생의 고난이나 시련으로 인해 매정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반대도 분명 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인생의 재앙이나 고난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자신이 겪어야 했던 재앙이나 고난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공감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고난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기도 하고, 고난 때문에 이전보다 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비슷한 재앙이나 고난을 겪었지만, 똑같은 반응이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반응이나 변화는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보다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닥친 재앙이나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전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고,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재앙이나 고통 가운데는 우리 실수나 잘못 때문에 벌어지는 것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욥의 경우처럼 도무지 그 원인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이나 고난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 때문에 벌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겪는 재앙이나 고난의 대부분은 우리가 미처 막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상치 못한 재앙이나 고난을 예방하는 것보다는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앙이나 고난을 겪을 때 내게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가 중요합니다. 내게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일어난 사건보다 내 삶에 더 크고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욥기가 지겹게 느껴질 정도로 오랜 과정을 통해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해 논쟁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도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답은 욥 자신만이 찾아야 하고 욥 자신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면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욥이 직접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재앙이나 고난에 대한 답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말씀이 욥기입니다. 욥기를 읽는 것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답을 찾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이 겪는 재앙과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일어난 사건에 얽매이기보다는 일어난 사건을 바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살면서 겪게 되는 그 어떤 고통이나 고난 시련도 우리를 이전보다 더 나쁘게 그리고 악하게 하는 도구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선하고 나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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