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기 38:1-3
욥기 강해 열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깨달음 그리고 영적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욥이 그토록 대면하길 원했던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등장으로 지금까지 욥이 겪은 원인도 이유도 알 수 없는 재앙과 고통에 관한 비밀이 풀릴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께 물었던 질문들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에게 무려 100여 개가 넘는 질문을 쏟아부으십니다.
지금까지 욥은 세 친구의 주장에 단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하나님의 폭풍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합니다. 욥은 왜 하나님의 폭풍 같은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것일까요? 진실은 욥이 하나님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답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물으시는 질문들은 어느 것 하나 욥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셨던 질문에 대해 우리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왜 욥이 그토록 알기를 원했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욥에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이 이유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욥에 대해 성경은 소개하기를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칭찬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에게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있었으며 동방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자녀의 복과 물질의 복을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너무나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마친 다음 날 아침에는 혹시 자녀들이 잔치 중에 실수하거나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이 있지는 않을까 해서 자녀들 숫자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하나님은 이런 욥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히브리어로 그 뜻은 대적자의 우두머리 또는 고발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며, 사람의 죄를 고발하여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한 것은 그가 누리고 있는 자식의 복과 물질의 복이 남부러운 것이 없는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사탄은 이런 것들이 욥에게 없었더라면 욥은 절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사탄이 생각하였던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사람이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얻는 것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하나님께 얻는 것이 없거나 자신에게 불행이 닥치면, 하루아침에 하나님을 돌아서서 배신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욥1:9 사탄이 주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사탄이 하나님께 묻는 이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사탄의 질문입니다. 사탄의 이 질문은 하나님께 하는 말이기보다는 사람에게 묻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는 물질의 복, 자식의 복, 건강의 복 때문이지 만약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지 않는다면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킬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과연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다고 해도 타인의 이익이나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세상에서의 형통을 약속하기보다는 고통과 고난을 겪는 것이라고 해도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묻는 말입니다.
사탄은 사람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욥이 누렸던 모든 재산을 빼앗고 열 자식의 생명을 하루아침에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사탄이 생각한 인간의 믿음은 오로지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는 물질의 복, 자식의 복, 건강의 복을 빼앗아 버리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전 재산과 자식 모두를 잃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온몸에 난 악성 종기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피나 나도록 긁어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사탄의 기대하고 예상한 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욥은 결코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욥의 아내조차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했지만,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욥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탄은 인간에게는 보상이 없는 믿음은 불가능하다며 하나님께 시비를 걸고 욥을 시험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도 끝까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욥을 확인하고는 욥기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려는 사탄에게 끊임없이 휘둘리는 삶을 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탄의 주장에 놀아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식과 물질과 건강이라는 세상의 복을 가지고 장난질하며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하고 넘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잘 믿었더니 세상에서 큰 복을 받았다는 간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았더니 큰 고통을 겪었다는 식의 간증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래의 대상으로 여기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사탄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과 주고받는 거래로 전락하기를 원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게 만들고, 하나님을 잘 믿었더니 세상에서 복을 받았다고 믿게 만들길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믿음에 틈을 내고 이간질 하고 불신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엄청난 재앙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욥의 세 친구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이 찾아왔습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은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은 모두 그가 지은 죄로 대한 대가이며 형벌이라고 주장합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욥을 정죄하면서 내세운 공통된 주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정의롭고 선하신 분이시기에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시고, 선한 일에 대해서는 상을 내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루아침에 자녀들이 몰살하고 모든 재물이 사라져 버리며 욥의 온몸에 악성 종기가 난 것은 사람들은 모르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것을 상선벌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신명기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신명기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신28:2-3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너희에게 찾아와서 너희를 따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신28:15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또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온갖 저주가 너희에게 닥쳐올 것이다. 너희는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고,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고 뿌린 대로 거두는 자연의 법칙처럼,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화를 당하게 된다는 것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인생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추수의 법칙이나 상선벌악의 법칙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법칙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 추수의 법칙이나 상선벌악의 법칙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인가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심은 대로 거두고 뿌린 대로 항상 거둘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뭄이 나거나 홍수가 나고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면 심은 대로 뿌린 대로 거둘 수 없는 것이 농사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사람이 항상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항상 벌을 받는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자연에도 수많은 변수가 있듯이 인생에는 자연보다 더 많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며 저주를 받는다는 신명기 신앙은 어떻습니까? 과연 기독교인들의 삶은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말씀처럼 그대로 이루어질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신실하고 정직한 목사나 교인은 손해 보고,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고 교회를 이용하는 목사나 교인들이 승승장구하는 경우를 너무나 쉽게 그리고 자주 보게 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오류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신명기 27장과 28장의 말씀은 결코 한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신명기 28장뿐만 아니라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규정과 규례를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이 하나님의 규정과 규례를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교묘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모두가 잘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개인이 잘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이 잘한다고 해도 공동체 전체가 잘하지 못하며 개인이 잘하는 것만으로 복이 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남편만 잘한다고 또는 아내만 잘한다고 절대로 행복한 부부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 다 잘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 한 사람 잘한다고 또는 장로님 한 분 잘한다고 좋은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함께 협력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좋은 교회를 이루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오로지 나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그 사람이 소속된 공동체 전체가 복을 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말하는 진짜 복은 관계의 회복에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나만 더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이 겪는 재앙의 원인과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해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왜 그가 가졌던 의문을 속 시원히 풀어주지 않으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그 어떤 설명으로도 욥이 가진 의문을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욥 역시 자신을 정죄하고 책망했던 세 친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선벌악의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욥과 세 친구의 신앙에서 차이가 있다면 욥의 세 친구는 상선벌악의 신앙으로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 믿었습니다. 반면에 욥은 상선벌악의 법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관한 답답함과 억울함이 가득했던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욥이 가진 답답함과 억울함을 해결해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욥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쏟아놓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에게 정의로우신 하나님 그 이상의 하나님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잘했으니 여기에 상응하는 상을 받고 이 만큼 잘못했으니 거기에 비례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상선벌악 그 이상의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부당한 고통을 받는다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한 그 역시 그의 세 친구처럼 인과응보의 한계를 절대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상선벌악, 인과응보의 신앙으로는 아무런 죄도 없는 자신이 겪어야 하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고통을 절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영적 도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편협하고 협소한 신앙과 생각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고통받을 수도 있다는 인생의 신비를 깨닫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죄도 없이 고난을 겪으셔야 했지만, 부당하다고 부조리하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고한 고난이 정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엄격한 도덕 질서만을 추구하던 세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랑과 용서라는 새로운 세계로 나가게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