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욥기 38:4-39:30
욥기 강해 열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설교에 대해 간단한 안내 말씀 먼저 전하려고 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 교회 몇 분이 제 설교가 너무 길어 교회 나오기가 힘들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설교 내용을 가지고 교회 나오기가 힘들다고 하셨다면 저로서도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교가 너무 길어서 교회를 나올 수 없다고 하는데 그깟 설교 줄이는 것이 무슨 대순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설교를 최대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대부분은 짧아진 설교 시간이 너무 좋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분이 짧아진 설교가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혹여나 짧아진 설교로 인해 목사가 변했다, 목사가 열정이 식었다, 오해하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예배가 미국 교회 예배보다 일찍 끝나게 되면 미국 교회 예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욥은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재앙과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 만나 왜 자신이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따져보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등장으로 욥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재앙과 고통에 관한 비밀이 풀릴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에 관해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으십니다. 대답은커녕 오히려 욥에게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부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의 말씀은 욥을 향해 쏟아부으시는 폭풍 같은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하라고 말씀하시고는 욥에게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부으십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어느 것 하나도 욥이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폭풍같이 질문을 쏟아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향해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정말 욥의 대답을 듣기를 원하셔서 물으신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욥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부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욥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통해 욥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보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욥38:6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욥38:18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어디 네 말 한 번 들어 보자.
욥38:19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욥38:12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네가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이 트게 해 본 일이 있느냐? 새벽에게 명령하여 새벽이 제자리를 지키게 한 일이 있느냐?
욥39:19-20 욥은 대답해 보아라. 말에게 강한 힘을 준 것이 너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달아 준 것이 너냐? 네가 말을 메뚜기처럼 뛰게 만들었느냐? 사람을 두렵게 하는 그 위세 당당한 콧소리를 네가 만들어 주었느냐?
욥기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욥기 강해를 듣고도 욥처럼 고난을 잘 참고 견디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참 슬플 것 같습니다. 욥기는 고난을 잘 참고 견디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재앙이나 고난의 원인이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는 말씀도 아닙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내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교인이 교회 좀 다니며 성경 조금 읽고 배운 것 가지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누구보다 가장 잘 안다고 착각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말끝마다 하나님의 뜻 운운하며 마치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너무나 있습니다.
책을 아주 많이 읽는 사람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깨닫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입니까? 자신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공부를 아주 많이 한 사람은 공부하면 할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나 공부를 남들보다 조금 더 한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 양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지극히 일부분이며 제대로 아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능하시고 신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신앙인은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집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성도님 한 분이 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미 제가 개인적으로 그분에게 답을 드렸지만,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좋은 질문이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복음에 대한 확신도 있고 이 길을 가야 한다는 믿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득문득 제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제대로 된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인지 의심스럽고 걱정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이번 욥기 강해를 들으면서 제가 많은 것을 잘못 알고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내가 이번 강해를 놓쳤다면 얼마나 또 잘못된 길을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라 믿으며 가고 있을까 등골이 서늘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요?”
이것이 저에게 주신 질문의 요지였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하신 분이 욥기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욥은 세 친구와 그렇게 많은 논쟁을 하였지만, 욥은 물론이고 욥의 세 친구 역시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욥은 물론이고 욥의 세 친구 그리고 나중에 논쟁에 참여했던 엘리후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하나님으로 상대방을 강요하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바다의 모래알보다 더 작은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생각은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하기는커녕 턱없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좀처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잘못됐거나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 믿어왔던 자신의 신앙이 다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잘못된 믿음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믿음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잘못 믿어 왔던 것을 깨닫거나 지금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은 우리를 이전보다 더 나은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믿음을 인정하지도 않고 고치려고도 하지 않기에 우리의 신앙이 자꾸만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념이나 확신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편견들을 극복해 가는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정답을 알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통해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대부분은 정작 자신은 조금도 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오직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목사는 교인을 교인은 목사를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모든 판단의 기준은 항상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을 변화시키려고 하면 변화는커녕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만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정말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가장 먼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서 남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질문 있으면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