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기 40:1-14
욥기 강해 열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가진 편견과 오해를 깨뜨리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그리고 깊이 아는 것은 하나님께 지음 받은 우리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상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욥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욥에게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욥이 왜 그토록 엄청난 재앙과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두 번째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내가 묻는 것에 대해 대답해 보라고만 하십니다.
욥40: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두 번에 걸친 하나님의 임재에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욥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두 번에 걸쳐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 가운데 욥과 같은 인정과 칭찬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욥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그런데 욥기 38장과 40장에선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욥기 38장에서는 어리석은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욥기 40장에선 트집 잡는 자, 하나님을 탓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억울하고 부당해 보이는 재앙과 고통을 겪는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욥38: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40: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의 온전함과 의로움에 대해서는 인정하셨지만, 그가 가진 하나님에 관한 생각은 잘못됐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욥은 하나님의 질서와 섭리를 상선벌악이라는 인간의 도덕 논리로 이해하고 제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상선벌악의 믿음은 욥의 세 친구가 가졌던 믿음이며 동시에 욥이 가졌던 믿음이기도 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그토록 엄청난 재앙과 고통을 겪는 데에는 반드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생각했던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에게는 남모르게 하나님께 지은 죄가 있으며 그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반면에 욥은 자신은 무고하고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이런 재앙과 고통을 겪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기독교의 상선벌악, 유교의 권선징악 불교의 인과응보는 가장 오래된 인간의 윤리적 이상이며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정의입니다. 상선벌악을 지금 우리 시대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능력주의 또는 업적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나 업적에 따라 상과 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신념일 것입니다.
하지만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사람의 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빗방울이 선한 자의 곡식을 축복하려고 내리는 것도 아니며, 모든 가뭄이 사악한 자를 징계하기 위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에도 비는 내립니다.
욥38:26-27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오직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자연과 세상 그리고 우주는 인간 중심의 눈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큽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상상력과 이해를 벗어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의 선행에 상을 주시고 악행에 벌을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창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선벌악, 지금 우리식으로는 능력주의는 결코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인간의 방식이며 인간이 추구하는 정의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도덕과 정의로 하나님의 질서나 뜻을 제한하려는 것은 매우 심각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며 편견이고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 일꾼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들을 구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만 일꾼을 구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홉 시, 열두 시, 세 시, 그리고 해가 지기 직전인 오후 다섯 시에도 일꾼을 구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해가 지고 포도원 일을 마치고 하루 품삯을 계산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 데 가장 늦게 온 사람부터 품삯을 줍니다. 맨 마지막으로 포도원에 와서는 해가 지기까지 겨우 한 시간 정도 일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돈을 주는 것입니다. 일은 한 시간도 채 못했는데 포도원 주인은 이들에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다른 일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가장 늦게 포도원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자신들은 더 많은 품삯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나중에 포도원에 온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더 많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포도원 주인은 오후 3시에 온 일꾼도 12시에 온 일꾼도, 아침 9시에 온 일꾼도 오후 5시에 온 일꾼들처럼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 주었습니다. 심지어 이른 아침 가장 일찍 포도원에 온 일꾼들에게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 품삯으로 주었습니다.
그러자 가장 일찍 포도원에 온 일꾼들이 자신이 받은 품삯을 가지고 주인에게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이들은 왜 주인이 나누어 준 품삯에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을까요? 주인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주인은 그들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주인과 계약할 때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고 주인은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은 지급하였습니다.
마20:2 그는 하루에 한 데나리온으로 일꾼들과 합의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주인과 일꾼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이 지급한 데나리온은 결코 인색한 품삯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동자가 받는 정당한 하루의 품삯이었습니다. 주인과 품꾼들이 맺은 계약은 절대로 불공평한 계약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른 아침 포도원에 와서 일한 일꾼들은 포도원 주인의 처사를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여러분은 포도원 주인의 계산이 마음에 드십니까? 아마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저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은 자신을 해 질 무렵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이 아니라 이른 아침 포도원에 일하러 온 사람들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이른 아침에 온 일꾼이라 생각하니까 주인의 품삯 계산이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이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해지기 전 다섯 시에 포도원에 온 일꾼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인의 계산법은 정말 너무나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계산법이 됩니다. 하루 일해서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는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어도 한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어떤 처지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주인의 계산은 문제가 많은 계산법이 될 수도 있고 대단히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계산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능력, 성과, 업적으로 따진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말씀을 마칩니다.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왜 그토록 온전하고 의롭다고 칭찬하셨던 욥을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트집 잡는 자, 하나님을 탓하는 자라며 책망하신 것입니까? 비록 그의 행위가 온전하고 의로웠지만, 자신이 가진 하나님에 관한 생각과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제멋대로 제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욥이 이전에 누렸던 자식의 복과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은 그가 보여준 의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겪어야 했던 재앙과 고통은 그가 저지른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개인의 능력이나 성과에 따라 상이나 벌을 내리는 분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이며 잘못된 믿음입니다.
마5:45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을 인간이 행한 선에는 상을, 악에는 벌을 내리는 분으로 여기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인간의 행동에 제한받는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상과 벌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여기지만 결국, 하나님을 인간의 행동에 따라 인간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가를 내리는 분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시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질문 있으면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