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한번 하나님이 되어보아라!
욥기 40:6-14
욥기 강해 스무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네가 한번 하나님이 되어보아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욥기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가진 신앙의 편견과 한계를 뛰어넘어 이전보다 더 성숙하고 깊은 신앙의 사람으로 도약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설교 후에 항상 설교에 관해 질문을 받습니다. 물론 질문이 있으시냐고 물어도 질문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난주에도 설교 후에 질문이 있냐고 여쭈었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설교를 유튜브에 올리고서 제 설교를 듣다가 제가 제 설교에 질문이 생겼습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기독교를 비롯해 대부분 종교가 추구하는 상선벌악, 권선징악, 인과응보는 인간의 방식이며 인간이 추구하는 정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복주의 능력주의 공로주의는 일종의 상선벌악 파생상품과 같은 것입니다. 상선벌악이 얼핏 대단히 정의로운 방식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며 이런 것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룰 수 없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윤리이자 정의라고 믿는 상선벌악은 사라져야 할 잘못된 가치인가요? 능력에 따라 차등하여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고 여기는 능력주의는 잘못된 방법인가요?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고 잘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것이 잘못된 신앙일까요? 지난주 설교를 들으면 누구라도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이런 의문이 들지 않는데 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건가요?
상선벌악이든, 또는 능력주의든 심지어 기복주의조차도 없어져야 할 가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한 일에는 마땅한 상급이 주어져야 하고, 악한 일에는 적절한 벌이 따라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상선벌악의 방식이나 능력주의 방식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고 나누는 선과 악 철저히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능력주의는 절대로 공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영적 도전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정의 그 이상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상선벌악이든 인과응보든 요즘 식으로 능력주의나 성과주의 신앙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제멋대로 오해하여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세 친구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들은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도 아닌데도 자기들 마음대로 단정하여 욥을 정죄했습니다. 욥이 겪는 재앙과 고통은 욥이 남몰래 저지른 죄를 벌주시기 위해 내리신 것이라 단정하고 욥에게 참회와 용서를 구하라고 책망했습니다.
이것은 욥도 세 친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욥 역시 세 친구와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제한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겪는 재앙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오해하고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심지어 욥은 자신이 겪는 재앙과 고통의 부당함을 주장하려고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욥40:8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한번 나 대신 하나님이 되어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불의를 모두 심판하고 네가 생각하는 정의를 세워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욥이 자신의 정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하나님께 원망과 하소연을 늘어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욥40:10-11 어디 한 번 위엄과 존귀를 갖추고, 영광과 영화를 갖추고, 교만한 자들을 노려보며, 네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내고, 그들의 기백을 꺾어 보아라.
욥이 가지고 있던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은 세상의 질서가 무엇입니까? 선한 사람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악한 자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땅한 통치 방식이어야 한다고 욥이 믿었던 믿음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겪는 현실과 자신이 본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생각과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욥21:6-9 내게 일어난 일은 기억에 떠올리기만 해도 떨리고, 몸에 소름이 끼친다.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
욥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아 부당하고 못마땅하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직접 하나님이 되어 세상의 불의를 다스려보라고 하십니다. 만약 욥이 하나님이 되어 욥이 사는 세상에 모든 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이루어낸다면 하나님께서 욥을 찬양하고 네가 주장했던 정의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욥40:12-14 모든 교만한 자를 살펴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짓밟아서 모두 땅에 묻어 보아라. 모두 얼굴을 천으로 감아서 무덤에 뉘어 보아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너를 찬양하고 네가 승리하였는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겠다.
네플릭스에서 방영하는 지옥이라는 한국의 연상호 감독이 만든 드라마가 세계적인 선풍을 끌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지옥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추구해온 상선벌악이라는 정의 가운데 특별히 악을 벌주는 것으로 이전보다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그릇된 종교관을 비판하는 드라마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기이한 존재가 특정한 사람에게 나타나서는 몇 날 몇일 당신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이것을 드라마에선 고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예고한 날이 되면 저승사자라고 하는 괴물이 나타나서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고지받은 사람을 잔혹하게 죽여버립니다. 이것을 시연이라고 합니다.
“새진리회”라고 하는 신흥종교 단체가 많은 돈을 주고는 고지를 받은 사람이 괴물에게 잔혹하게 목숨을 빼앗기는 시연 장면을 라이브로 중계합니다. 상상하기 힘든 초자연적이며 충격적인 장면을 본 사람들은 혼란과 엄청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단번에 새진리회가 가르치는 주장에 동조하며 따르게 됩니다.
새진리회는 본격적으로 지옥행을 고지받은 사람들을 찾아내서는 자신들의 성전에서 괴물들이 등장해 지옥행을 시연하는 일을 중계합니다. 사람들은 고지를 받고 괴물들에 의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해하기는커녕 이들에게 숨겨진 죄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려고 합니다. 게다가 새진리회를 추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과격하고 폭력적인 추종 세력들은 고지받은 사람들의 가족들을 찾아가서는 이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럼 괴물들에 의해 지옥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시연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정말 이전보다 더 정의로워졌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사소한 잘못에만 집착하며 벌벌 떨며 살아갑니다. 게다가 새진리회라는 종교단체는 세상의 정의를 독점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들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불의한 사람으로 정죄해 버립니다.
하지만 죽을죄를 지은 사람만 지옥행 고지를 받고 괴물들이 나타나 지옥으로 데려간다는 새진리회의 주장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갓난아기가 고지를 받은 것입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은 갓난아기가 고지를 받고 시연을 받는 사건이 계기가 되어 사람들은 새진리화의 주장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불평과 불만을 품는 욥에게 네가 한 번 하나님이 되어 네 방식대로 세상을 공의롭게 통치해보라고 하십니다. 욥이 정말 하나님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면 세상은 욥이 생각한 대로 정의로운 곳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상선벌악 또는 능력주의는 일종의 Vending Machine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만큼 의롭게 살았으니 이 정도의 축복이나 보상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저 사람은 이만큼 죄를 지었으니 거기에 비례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기대와 필요에 따라 응답하는 Vending Machine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은 선과 악을 나누고 상과 벌을 주는 것으로 정의를 이루려고 합니다. 물론 그 선과 악도 철저하게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선이고 불리한 것은 악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오래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가십니다. 그 하나님이 계시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구원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