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 마침내 회개한 이유
욥기 42:1-6
욥기 강해 스물두 번째 시간입니다. 드디어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 한 장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오늘은 “욥이 마침내 회개한 이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욥기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깨달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여겼습니다.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믿었던 욥의 친구들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친구들은 욥이 어떻게 해야 그가 겪고 있는 재앙과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겼습니까? 욥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는 친구들의 제안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욥은 왜 친구들의 권면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까?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토록 엄청난 재앙과 고난을 받아야 할 만한 죄를 지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이 문제를 가지고 세 차례에 걸친 오랜 논쟁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욥은 끝까지 이 모든 재앙과 고난이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받아야 하는 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라는 친구들의 끈질긴 요구에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는커녕 오히려 욥은 자신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이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고와 억울함을 하소연하며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하나님과 따져보길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 “사람 참 안 변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처럼 정말로 사람 참 안 변합니다. 정말 사람 잘 안 변합니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 행동이 옳고, 자기 믿음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항상 옳다고 여기니 변할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자신이 신앙이 항상 옳다고 믿으며, 자신이 아는 하나님이 마치 하나님의 전부라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이 지나쳐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다 안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고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남을 함부로 정죄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이들은 욥이 자신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호소하였음에도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을 더욱 강력하게 정죄하였습니다. 이들이 욥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에 대한 자신들이 주장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누구보다 신실하다고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부조리와 억울함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문제가 있다며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여긴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길 네가 네 옳음을 주장하려고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한다고 하셨습니다.
욥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이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준이 항상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가가 대부분 사람이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다 심각한 것은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행동, 나와 다른 믿음은 나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대부분은 자신은 조금도 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만 변하기만을 바랍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목사는 교인을 교인은 목사를 바꾸려고 합니다. 상대방이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런저런 충고를 늘어놓습니다. 그래도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 42장 6절을 보면 지금까지 자신의 무고함과 억울함만을 주장하던 욥이 마침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욥은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께 내뱉은 모든 말을 거두어들인다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욥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도대체 욥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이 내뱉은 말을 거두어들이며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까? 욥은 지금까지 자신이 옳고 친구들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욥은 자신이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고까지 여겼습니다. 하지만 비로소 욥은 자신이 옳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욥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옳고 내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옳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바꾸거나 변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바뀌고 변하려는 데에는 기를 쓰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까지 자신에게 맞게 바꾸려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자신이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변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변하는 것이 나에게 더 유리하거나 이익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누구도 바꾸고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모든 변화는 항상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깨닫고 변화되어야,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1도 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남만 변화시키려고 하면 변화는커녕 남의 마음에도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만 받게 됩니다.
욥기는 마침내 욥이 회개했다고 했는데 욥이 무엇을 회개한 것입니까? 욥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제멋대로 오해한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욥은 하나님을 자기 기준에 맞게 규정하고는 자신이 규정한 틀 안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맞추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자기가 생각한 정의가 자기가 가진 믿음이 하나님보다 더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욥은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상선벌악의 신앙이나 정의로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불의하고 부당한 재앙과 고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는 지금까지 자기 생각이나 믿음이 틀렸음을 깨달은 것입니다.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는 욥의 고백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줍니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은 친구들이 일러주는 말이나 소문을 통하여 자신이 알았던 하나님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자기의 생각으로 규정하고 한계를 그어놓은 하나님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귀로 듣기만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들어서 알게 된 하나님을 뛰어넘어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던 하나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욥처럼 도무지 이유도 원인도 알기 힘든 재앙이나 고난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비록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그 정확한 이유나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생의 예상치 못한 고난이나 어려움은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알고 믿었던 하나님을 뛰어넘게 합니다. 습관적으로 알고 믿었던 하나님으로는 내 인생의 예기치 못한 재앙이나 고난을 뛰어넘거나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