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카르페 디엠 (Carpe Diem)

마태복음 6:34

 

오늘은 마태복음 634절의 말씀을 가지고 카르페 디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라틴어로, 그 뜻은 현재를 붙잡으라는 것입니다.(Seize the Day) “현재를 즐겨라.”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카톡 프로필을 보신 분은 있으면 아시겠지만 제 카톡 프로필에는 두 문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Memento MoriCarpe Diem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제가 목회를 하고 인생을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카르페 디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인생에서 두 날만 염려하지 않으면 행복해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어제와 내일입니다. 어제는 과거에 대한 메타포라면 내일은 미래에 대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누구나 후회스러운 과거도 있을 것이고, 다시 되돌리고 싶은 과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한다고 해도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 때문에 후회하고 염려하는 대신 교훈을 얻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며 방법입니다. 과거의 실패나 후회가 또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과거에 있었던 실패나 후회를 통해 교훈과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후회하고 염려한다고 인생은 바뀌지 않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면 비슷한 실패나 후회가 우리 인생에서 반복될 것입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입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의 염려는 내일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일이라는 미래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 때문에 오늘이라는 삶을 희생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니 젤린스키라는 심리학자가 쓴 느리게 사는 즐거움(Don’t Hurry, Be Happy)”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염려의 40%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고, 우리가 하는 염려의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고, 우리가 하는 염려의 22%는 굳이 마음 졸이며 염려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들이며, 우리가 하는 염려의 4%는 아무리 내가 염려한다고 해도 내 능력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우리가 하는 염려의 4%는 우리가 충분히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어니 젤린스키의 충고처럼 우리 대부분의 염려는 불필요한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필요한 염려를 떨쳐 버리고 살기 위해선 우리가 하는 염려를 두 가지로 단순화 시킬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즉 내가 염려해서 해결할 수 있는 걱정과 내가 아무리 염려해도 해결할 수 없는 걱정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일 여행을 가야 하는데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이것은 내가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우리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많은 교인이 기도로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을 대단한 믿음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불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마저도 내가 대신하고자 한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은 비를 멈추도록 기도하기보다 우산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염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만 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더욱 나쁘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오래 염려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마비시키고 결국엔 염려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많은 현찰(Cash)을 집 안에 두고 살면 혹 도둑이 들지 않을까? 혹 집에 불이 나지 않을까? 별의별 상상을 하며 염려합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찰을 은행에 맡기면 됩니다. 비슷한 원리입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내가 아무리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사람이 아무런 염려도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끊임없이 염려에 사로잡힙니다.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없는 인생이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우리의 염려와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정말 소중한 오늘의 삶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일 매우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내일 매우 중요한 일로 염려하므로 오늘 하루를 제대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즐기지 못합니다. 나아가 이웃의 아픔도 돌아보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늘 하루 전부를 통째로 내일 일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일 일이 끝나면 내일에 대한 염려를 그치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일이 되면 모레를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오늘이 수단이 되고 내일이 목적이 되면, 우리의 오늘은, 우리의 현재는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사는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오늘을 살면서 지금 누려야 할 모든 기쁨과 행복을 내일로 연기하게 만듭니다. 물론 지금 고생하는 것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비록 오늘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내일은 행복할 것이라는 신념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내일이 오늘이 되는 순간, 모레가 또 내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자신이 바라고 기대했던 내일이 와도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두려운 삶을 살수 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 대부분의 착각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 누려야 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일에 부모와 자녀의 인생을 모두 투자합니다.


정말 자녀들이 대학에만 들어가면 자녀의 미래가 저절로 보장받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무엇을 염려해야 합니까? 연봉을 많이 주는 직장을 구하는 데에 대학 시절 전부를 희생해야 합니다.


그럼 대학 시절 많은 연봉을 주는 직장을 구하는 데에 투자해서 연봉을 많이 주는 직장을 잡으면 모든 미래의 문제가 해결되던가요? 아니요. 직장을 잡는 순간 결혼을 걱정해야 하고, 결혼하는 순간부터 육아를 걱정해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미래를 염려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신의 노후도 준비해야 합니다.


어떨 때 보면 사람이 사는 것이 노후를 준비하기 위한 삶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적처럼 보입니다. 과연 이것이 인생인지도 의문이지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노후를 맞이하기만 하면 사람은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노후가 되면 질병 걱정도 해야 하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노후의 문제가 또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미래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파랑새와 같습니다. 행복을 약속해 준다던 내일이 계속 고통스러운 오늘로 변할 테니까 말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내일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염려와 걱정만 하며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드라마에서 흔히 남자들이 술에 취해서 오늘 먹고 죽자는 말처럼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나 꿈을 가지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오늘의 삶을 미래를 위해서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오늘의 삶이 있고 내일은 내일의 삶이 있는데 지금 충실해야 하는 삶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것입니다.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임박한 종말론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은 몇 날 며칠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왜 모르게 하셨습니까?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최선을 다해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오늘을 사는 것이지 내일을 미리 살 수 없습니다. 누가 감히 내일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누가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내일이 없습니다. 우리에겐 내일이 없기에 오늘을 제멋대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과 그때를 아무도 모르기에 오늘 하루를 내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여기며 사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에게 끝이 있고, 종말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으라는 예수님의 충고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이날이 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기독교 신앙의 영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19개월 무렵 병으로 시력과 청력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평생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그녀가 쓴 책 중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란 책이 있습니다.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삶을 산 그녀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우리에게 주는 충고입니다.


마치 내일부터는 앞을 못 보게 될 것처럼 눈을 사용하십시오. 내일 귀머거리가 된다 생각하고 온갖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음악, 새들의 노랫소리, 오케스트라의 강력한 선율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내일부터는 더 이상 촉각을 느끼지 못한다 생각하고 만지고 싶은 사물을 만져 보십시오. 내일이면 후각과 미각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이라 가정하며 꽃향기를 맡고 한 입 한 입의 음식을 음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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