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전도서 4:1-6
전도서 강해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전도서는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3장은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과 때가 있다는 말씀이었다면 전도서 4장은 전도자가 본 세상의 현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4:1a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전도서 4장에는 “보다”, “보았다”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번만 본 것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그냥 스치듯 대충 본 것이 아닙니다. 주의 깊게 그리고 예리하게 세상을 보고 인간을 보았습니다.
전4:4 내가 또 본즉
전4:7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전4:15 내가 본즉
이처럼 전도서 4장은 전도자가 주의 깊게 지켜보고 관찰한 세상과 인생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도서 4장에서만 “내가 보았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서 여러 곳에서 “내가 보니”로 시작되는 글이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전도자가 해 아래 세상과 인생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에는 다양한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꼽는다면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인간을 보는 관점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 전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은 세계관과 인간관(인생관)이라고도 합니다.
전도자가 보는 세상의 모습은 지난주에 살펴본 전도서 3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전도서 3장에서 전도자는 가장 공정해야 할 재판하는 곳에도 악이 있으며,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일에도 악이 있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짐승보다 더 나을 수 없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나 짐승 모두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며 죽으면 모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3:16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전도서 4장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자신이 지켜보고 관찰한 세상의 모습과 인간의 현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 4장에서 전도자가 본 세상의 현실은 전도서 3장의 말씀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비극적입니다. 전도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류의 학대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전도자가 본 세상은 조금도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전4: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도자가 세상에서 본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학대입니다. 그리고 학대받는 자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전도자가 관찰한 세상의 현실이 얼마나 모질었으면 전도서 4장 1절 짧은 한 구절에 학대라는 단어를 3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반복한다는 것은 강조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학대하는 사람과 학대로 눈물 흘리는 사람만 있지, 학대받는 사람을 위로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음을 보았습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이 권세 없는 사람을 학대해도 이들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음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자가 살던 시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전도서 3장에서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소망을 잃지 말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며 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도서 4장에서는 부당하고 불의하게 학대받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전3:17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도대체 전도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억울한 눈물 흘리는 사람을 위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아무런 기대도 소망도 가지고 살지 말라는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세상의 비참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무시하지도 외면하지도 말고 똑바로 보라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전도자가 본 억압의 현실이 얼마나 냉혹하고 비참했으면 그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이미 죽은 사람이 더 복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히브리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을 축하했다.”라는 뜻입니다. 전도자가 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사람은 더는 억압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전4: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심지어 전도자는 살면서 억압을 받는 자들과 이미 오래전에 죽어 더는 억압을 받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복된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전4:3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전도자가 죽은 자가 복되다 또는 아직 출생하지 않은 자가 복되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않아도 되거나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전도자는 학대받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나 출생하지 않은 사람은 학대하고 억압하는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탈출한 사람을 나타내는 메타포라 할 수 있습니다.
자칫 전도자의 이러한 선언은 마치 삶을 저주하고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불의한 이 세상은 빨리 멸망해 버리고 죽음 이후 저세상만 바라며 살라고 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 만연하여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해 아래, 세상에서 벌어지는 있는 학대와 억압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인지를 제발 절실하게 체감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킨다는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모두가 “권세”만을 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힘”에만 의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의 법도를 오직 “권세과 돈”에서만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비참한 현실을 만든 것입니다.
전도자가 지켜본 인간의 현실이 위로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는 것은 세상에는 불의한 자들만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도자가 본 인간 세상의 비참함은 모두 경쟁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할 사람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세상은 억압하는 사람과 억압당하는 사람만 있지, 위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 것입니다.
전4:4(새번역)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경쟁심이 무엇입니까?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욕심입니다. 함께 도우며 살아야 할 이웃끼리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욕심 때문에 약육강식의 비정한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아무 노력도 안 하고 사는 것도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양손에 가득 쥐기 위해 반드시 남을 이기려고 하는 것도 결코 지혜로운 일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양손에 가득 쥐려는 것보다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전4:6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전도자가 바라본 세상의 모습과 인간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대단히 비참하고 비극적입니다. 공정과 공의, 사랑과 용서, 더불어 살고자 하는 나눔과 사랑이라곤 찾아보기 힘들고 오직 불의와 억압과 경쟁과 부질없고 헛된 것들에만 집착하는 허무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살펴보고 관찰한 비정하고 비참한 현실에 대해 조금도 감추거나 포장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살펴보고 관찰한 세상과 인간의 현실은 뼈아프지만, 대단히 진실합니다. 진실한 말은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때 진실에서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진실에서 가까워야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것은 세상과 사람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세상과 사람을 긍정적으로 좋게만 본다고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긍정은 세상의 비정함과 추함 그리고 사람의 이기심과 악함을 발견하는 순간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반대로 세상과 사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아 빨리 망해버리라고 저주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사람을 결코 망해버려야 할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정확하고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현실을 보고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세상을 헛되지 않게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