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전도서 7:23-29
전도서 강해 스물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전도자가 본 세상의 현실은 의인이 고통을 겪고 악인이 장수하고 형통하는 불의하고 모순되어 보이는 현실이었습니다. 의인은 상을 받고 악인을 벌을 받아야 하는 상선벌악의 믿음은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 전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가 본 세상의 불의한 현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앙 전통으로 도무지 이해하지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습니다.
전7: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도자는 상선벌악의 신앙 전통이 실현되지 않는 불의한 현실이 계속되는 이유를 의인의 부재에 두었습니다. 전도자가 깨달은 인간의 실상은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인간들이 모여서 만들어 가는 세상이 불의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전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전도자는 의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자신이라도 지혜자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의인이 되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가 깨달은 사실은 자신의 그 모든 노력으로도 지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전도자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전7:23-24 나는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해 보았다. 내가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하고 결심해 보았지만, 지혜가 나를 멀리하더라.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멀고 깊으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지혜자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지혜가 자신을 멀리했다는 전도자의 탄식은 지혜에 대한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지혜는 지식이 아닙니다. 많이 공부하고 노력한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위가 높아진다고 지혜롭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자는 지혜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지혜자가 될 수도 없었고 지혜를 얻지도 못했습니다. 자신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지혜자가 될 수 없었던 전도자가 자신이 가진 지혜와 지식을 다해 살피고 연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전도자는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 알려고 했습니다.
전7: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전도자는 왜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일인가를 알려고 했던 것일까요? 전도자는 온전한 의인이 될 수 없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혜는 인간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깨닫는 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인간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통해 인간이 왜 의로워질 수 없는지를 깨닫길 원했던 것입니다.
전도자가 알아낸 인간의 악함과 어리석음에 관한 첫 번째 깨달음은 전도서 7장 26절의 말씀입니다. 전도자가 깨달은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일종의 메타포입니다. 무엇에 대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을 유혹하여 파멸로 이끄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것을 죽음보다 더 쓰다고 했습니다.
전7:26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으로 인해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삼손입니다. 삼손은 나귀 턱뼈를 가지고 혼자서 블레셋 군사 천명을 죽였던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용사였습니다. 그런 삼손이 누구 때문에 두 눈이 뽑힌 채 감옥에서 맷돌이나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까? ‘드릴라’라는 아리따운 여인의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왕이라 칭송받던 솔로몬이 타락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리따운 이방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타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방 여인들의 유혹으로 인한 솔로몬의 타락은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타락하게 만들어 파멸하게 만드는 것은 엄청난 시련이나 고통이 아닙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인간이 스스로 타락하여 파멸에 빠지는 대부분 경우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아주 작은 유혹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남들이 유혹에 넘어지는 것을 보면 나도 유혹에 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절대로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과 스스로에 대한 과신이 결국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하는 가장 큰 유혹이 됩니다. 상황만 주어진다면 우리는 누구나 유혹에 빠질 수 있고,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절대로 어떤 시험(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겠다고 자신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시험(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반대로 나는 아주 작은 시험(유혹)에도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시험(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유혹은 참거나 이기는 것이 아니라 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유혹을 대처하는 최고의 상책입니다. 자신은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며 유혹과 맞서려는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유혹에 빠져서 스스로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과신하여 유혹에 맞서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생각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유혹은 그 힘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유혹이 있는 장소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혹의 상황에서는 유혹을 피하는 것이 유혹이라는 시험을 이기는 최고의 길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전도자가 깨달은 인간의 악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또 다른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전도서 7장 27절과 28절의 말씀은 전도자가 깨달은 두 번째 깨달음입니다. 전도자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사람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전도자가 찾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전7:27-28 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았는데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사람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는 전도자의 고백은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을 도무지 찾기 어렸다는 것을 나타내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전도자의 절망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의인 열 명을 찾고자 했던 아브라함의 절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하지만 전도자의 표현은 대단히 여성 차별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은 전도자 역시 시대와 문화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전도자가 보여준 여성 차별적 관점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불완전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찾으려고 했으나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전도자는 절망 끝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전도자가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정직하게 바르게 의롭게 지으셨으나 사람들이 많은 꾀를 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불의한 현실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세상에서 의인을 찾기가 그토록 어려운지에 대한 해답과도 같은 깨달음입니다.
전7: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태초부터 불공정하고 불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을 닮은 선한 존재 의로운 존재로 만드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의로운 사람이 세상에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보다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세상이 무엇입니까? 의인이 고통받고 멸망하며 악인이 형통하고 장수하는 불의하고 부당한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불공정하고 불의해 보이는 현실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사람들이 만들어낸 현실입니다. 불공정하고 불의한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원하고, 악하고 어리석은 우리 인생이 조금이라도 바꾸길 원하면, 지금 당장 내가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