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행복은?
요한복음 4:13-14
오늘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행복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은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는 분 있습니까? 아마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것 여기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다고 말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행복하기를 원하는 행복 본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은 단지 사람의 욕심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어 사람을 복되게 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복된 삶을 사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나 소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창조의 질서이자 원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어 복된 삶을 사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복 있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막상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막상 무엇이 인생의 행복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소유를 통해, 더 높은 권세를 통해, 더 황홀한 쾌락을 통해 인생의 행복을 찾아보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행복을 잡았다고 생각하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중요한 이유도 복된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추구하는 복과 교회가 추구하는 복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세상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는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교회는 행복한 인생을 위해선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H. Maslow)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에게는 다섯 단계의 욕구가 있다는 욕구 단계(Hierarchy of Needs)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단계별로 다섯 단계의 욕구가 있으며 각 단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각 단계의 욕구를 충족할 때 행복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입니다. 생리적 욕구는 인간의 생존을 유지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것으로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 등의 가장 기본적이며 본능적인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빵 한 조각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있습니다. 매슬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지 않는 한 다음 단계의 욕구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2단계는 안전의 욕구(Safety Needs)입니다. 안전의 욕구는 생명의 안전을 비롯하여 건강, 재산, 안정적인 직업 등 인생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은 생리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안전의 욕구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욕구는 신체 및 감정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안전하기를 바라는 욕구입니다.
3단계는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Belonging and Love Needs)입니다.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를 사회적 욕구라고도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므로 어디에 소속하거나,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욕구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동료 간의 친교와 이성 간의 교제 또는 결혼을 추구하게 됩니다.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소속감이나 애정욕구가 가장 지배적인 욕구로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4단계는 존경의 욕구(Esteem Needs)입니다. 집단이나 모임 또는 가정을 이루어 소속감의 욕구를 충족하면, 이때부터 사람은 그 집단 구성원으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는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소속된 집단에서 자신의 지위나 명예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처럼 지위나 명예을 얻으려는 존경의 욕구라고 합니다.
마지막 5단계는 자아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라고 했습니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인간다움 또는 자기다움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이루려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윤리적인 삶을 살려고 하며, 삶의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며 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매슬로의 주장에 따르면, 4단계까지의 욕구를 결핍 욕구(Deficiency Needs)라고 해서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하는 욕구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는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결핍 욕구가 아니라, 자기의 내면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욕구라고 해서 성장 욕구 또는 존재 욕구라고 구분했습니다.
매슬로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단계의 결핍 욕구를 충족하려는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슬로는 자기 인생 후반에 자신의 주장을 뒤엎고 마지막 5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는 1단계인 생리적 욕구보다 인간에게 추구의 정도가 강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1단계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5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실현하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즉 인간의 생존을 위한 생리적 욕구보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인간에게는 가장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욕구라는 것입니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에 의하면 사람은 어떤 단계의 욕구를 충족하기가 가장 쉽겠습니까? 1단계인 생리적 욕구입니다. 생리적 욕구는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고 졸리면 자면 되고 똥 마려우면 똥 누면 됩니다.
반대로 가장 충족하기 어려운 욕구는 무엇입니까?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내면이라고 할 수 있는 가치관이나 인격 또는 신앙을 성숙시키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때론 힘든 고통도 오랫동안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욕구를 채울 때 사람이 가장 큰 만족이나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할 때입니다. 반대로 욕구를 충족해도 만족이나 행복의 크기가 가장 작은 것은 무엇입니까? 생리적 욕구를 충족할 때입니다.
매슬로의 욕구 이론은 사람은 왜 등 따뜻하고 배부르다고 행복하지 못한가에 대해 가장 적절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결핍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도 못하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성장 욕구 또는 존재 욕구라고 하는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해야 비로소 참된 인생의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창조원리라고 믿습니다.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때는 결핍된 무언가를 채우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때는 사람이 본능과 욕구만 가진 동물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갈 때, 사람이 사람다움을 회복할 때 사람은 비로소 가장 큰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에서 남편 다섯을 가졌던 여인을 만났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세상이 추구하고 가르치는 행복은 늘 제한적입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가지고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누구나 성공하고, 누구나 권세나 명예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희소성을 가지고 세상은 이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경이 가르치는 행복은 무엇을 성취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면 이 사람은 무엇을 하든 자신이 하는 일로 자신도 행복할 뿐만 아니라 남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복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Happiness와 Blessing입니다. 행복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appiness의 어원은 happen이라고 합니다. happen이 뭐예요. 우연히 생겨난 일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세상이 말하는 happiness는 우연히 생겨난 복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사용하는 Blessing의 어원은 무엇입니까? bleed입니다. 피 흘린다는 뜻입니다. 피 흘린다는 것은 구약에서 피 흘림의 제사에서 시작된 단어로 희생, 섬김, 봉사를 의미하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복을 빌 때 happy birthday, happy anniversary, happy new year라고 하지만 성경은 bless를 사용합니다.
이 사실이 주는 영적 도전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복은 happiness 즉 우연히 얻어진 복이 아니라 blessing 희생과 섬김을 통해 이루어 가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복 happiness가 나만 좋으면 되는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의 복 blessing은 나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다른 사람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실 때, 바로 주시지 아니하고 천사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복에 질투가 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숨겨두기로 했답니다.
천사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라고 하신 복을 숨겨두기 위해 의논을 했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다 숨겨둘까?" 그랬더니 다른 천사가 “사람들은 재주가 많아서 찾아낼 거야.” 말했습니다. 그럼 "아주 높은 산중 꼭대기에다 갖다 감춰놓을까?" 또 다른 천사가 “사람들은 모험심이 많아서 거기까지 뒤져서 행복을 다 찾아낼 거야.” 말했습니다.
그때 한 천사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자기 머리만 믿고, 재주만 믿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에다 복을 숨겨두면 사람이 못 찾을 거라고 제안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라고 하신 복을 사람의 마음에 숨겼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마음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는 자기 머리만 믿고 엉뚱한 곳에서만 행복을 찾아서 헤매고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행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부터 이미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성취하거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있지 않고 내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가장 분명하고도 확실한 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전도서는 기록하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세상과 인생을 보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눈앞의 이익에 따라 사는 인생 아니라 영원의 눈으로 인생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