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것
베드로후서 1:4-11
어떻게 인생을 즐기며 살 것인가? 여덟 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 복된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합니다.
사회심리학자이며 철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자신의 책에서 인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소유형의 인간과 존재형의 인간입니다. 소유형의 인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더 많은 것을 소유(to hav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존재형의 인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인간답게 사는(to be)데 두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많은 소유가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거짓된 확신과 믿음을 사람들에게 세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소유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존재 가치라 할 수 있는 인격이나 양심을 파는 일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더 가지고 싶은 욕망에 자신의 인격도 버립니다. 자존감도 버립니다. 신앙도 뒤로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더 행복해졌을까요? 아니요. 더 불행해졌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에 관하여 매우 심각한 오해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곧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오해와 착각입니다.
더 많은 돈이 사람을 잘살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는 생각은 행복에 대한 가장 잘못된 믿음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상이 주는 거짓 확신이요 거짓 믿음입니다. 정말 돈이 사람을 잘살게 하고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돈이 많은 사람은 다 잘살고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여러분들이 아는 부자들은 모두 다 행복하던가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들이 아는 가난한 사람들은 다 불행하던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부자면서 행복한 사람도 있고, 가난하면서 불행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부자면서 불행한 사람이 있고, 가난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또는 부족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돈을 행복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잘못된 믿음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직 돈 하나에만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니, 돈 말고 다른 것을 통해서 인생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능력과 실력이 우리에게서 사라졌습니다.
돈이 정말 우리를 복되고 존귀하게 한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소유 가치를 높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잘 믿으면 모든 사람이 누리는 축복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은 천하보다 더 존귀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을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말로 바꾸면 존재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새로운 왕으로 기름 부을 사람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성경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품을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좋은 성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뿐만 아니라 행복한 삶을 지속하기 위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영적 비결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교인이 성품은 타고난 것이라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성품을 배우고 훈련하는 일에 아무런 노력이나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품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성품과 성격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성품과 성격은 혼동하여 사용하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격이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질이라고 한다면 성품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격과 성품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나 자주 실수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성품을 배우고 훈련하려고 하지 않고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성품이 아닌 타고난 성격을 바꾸려는 시도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부부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부부가 가장 이상적인 부부라고 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이 만나야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서로 다른 성격 차이가 가장 많은 이혼의 사유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부부로 맺어주었는데 서로의 약점을 돕기보다는 서로의 약점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나 교우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나 교우관계의 기본은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서로 돕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로 여기니까 인간관계나 교우관계나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돕게 하는 것이 바로 성품의 능력입니다.
타고난 외모나 재산으로 결혼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것은 멋진 외모나 재산만으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잘생긴 외모나 많은 재산이 결혼생활의 가장 위험한 요인이 됩니다. 결혼생활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부가 가진 성품에 달려 있습니다.
자식을 낳기만 하면 누구라도 부모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대화하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부모의 좋은 성품에 달려 있습니다. 부모의 좋은 성품만이 자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속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능력이나 남들보다 더 큰 노력이나 행운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룬 성공을 오랫동안 잘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성품이 따라 주어야 합니다. 좋은 성품이 없으면 자신이 이룬 성공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람의 존경도 받지 못합니다. 좋은 성품 없이 이룬 성공은 오히려 그 인생을 빨리 망가뜨리는 도구가 됩니다.
심지어 성품은 우리의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가 세상을 떠날 때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땅에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살면서 배우고 훈련했던 믿음과 성품입니다.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아무리 강조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성품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에는 우리의 성품이 너무나 턱없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품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순간에 회심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사람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회심했다고 그의 성품도 한순간에 바뀐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는 자기와 다른 사람을 용납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자기를 가장 많이 도와주었던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결별하였습니다.
이처럼 성품이란 결코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성공하기 위해 애쓰는 만큼만 우리의 성품을 가꾸고 만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한다면 누구나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의 성품을 연단하고 훈련하게 합니다. 우리의 성품을 연단하고 훈련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원하시는 성품이 있으면 그것과 가장 반대되는 상황에 놓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통해 우리의 성품을 연단하고 훈련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 가장 가까운 주변에 내가 도무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두십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배우자입니다. 물론 서로가 좋아해서 결혼했다고 하지만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또 누가 있습니까?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 중에 꼭 한두 명은 도무지 사랑하기 힘든 교인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둘째 치고 같은 교회를 다니는 것조차 싫은 사람이 꼭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통해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그런 사람을 견디고 참아 낼 줄 아는 성품을 훈련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 주변에 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들만 있다면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이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일입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을 신성한 성품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좋은 성품, 선한 성품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이 우연히 저절로 생기지 않듯이 성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성품을 갖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 신중한 계획과 의지 그리고 끈기 있게 성품을 가꾸는 필사적인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돈 벌기 위해 애쓰는 만큼의 절반만이라도 좋은 성품을 만들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좋은 성품 선한 성품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행복을 한순간의 이벤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원한다면 좋은 성품을 배우고 훈련하는 일에 그 어떤 것보다 우선순위를 두고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성품 선한 성품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존귀하고 복 있는 삶을 날마다 살아내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