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
마태복음 22:35-40
어떻게 인생을 복되게 살 것인가?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행복한 삶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깨달음과 영적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 배우게 되는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비결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첫째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많은 교인이 계명이라고 하면 우리를 규제하고 억압하는 종교적 규율쯤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계명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입니다. 계명은 우리를 규제하고 억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우리를 복되게 살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계명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시1:1-2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은 우리를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은 교인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서로 다른 두 개의 계명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을 결코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계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원인과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를 알려면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 일에 너무나 자주 실패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사랑을 의지와 노력의 문제가 아닌 감정의 문제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감정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감정과 내 기분에 좌우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생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이란 게 단순히 감정적으로 즐겁다고 행복한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내 수많은 책과 영화 그리고 노래의 주제 대부분은 단연코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랑에 관한 책과 영화를 보면서도, 그 많은 사랑에 관한 노래를 부르면서도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하는 것으로,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거나 어느 순간 불현듯 찾아오는 감정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에 있어 저절로 생기는 감정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감정은 활활 타는 장작과 같습니다. 활활 타는 장작이라도 하루가 지나면 싸늘한 잿더미로 변하는 것처럼 감정에만 의존하는 사랑은 결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친숙해질수록 친밀감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가 생기며 뜨거운 감정의 흔적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됩니다.
사랑보다 더 쉬운 일은 없고 사랑은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증거가 차고도 넘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본질을 너무 쉽게 흔들리고 변하는 감정에 두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 사랑의 대부분이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하였다가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다 보면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친절하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예의 바른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많이 만나도 힘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날 때마다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런 사람들만 만나지 못합니다. 예의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고 자기보다 강하면 아부나 하려고 하고 자기보다 약하면 함부로 여기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또한 남을 배려하고 도우려 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이용할까 궁리만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무례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며 함부로 말하고 심지어는 대놓고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면 제가 아무리 인격이 되는 목사라고 해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보다 본능적으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듭니다.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감정이 앞서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조용히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런 사람도 사랑해야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지, 그래야 목사지. 예의 바르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만 좋아하면 그게 무슨 목사야”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저의 이 고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본능적으로 마음이 느끼는 대로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관계를 맺고 예의 없고 배려할 줄 모르고 이기적인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고 아무런 관계도 갖지 말아야 할까요?
목회하다 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교회와 목사를 이용하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목사를 이용한다는 느낌이 들어도 저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심방하고 설교합니다. 물론 제 감정은 대단히 불편하고 싫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무리한 부탁을 해도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고 힘이 닿는 대로 도와줍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항상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감정이 불편한 감정이 제 믿음과 의지를 앞설 때가 있습니다. 안 그러려고 해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제 생각과 의지보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감정에 따라 대응하고 반응하고 행동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 목사로서 가져야 할 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까? 비록 감정이라는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믿음과 의지로 교회와 목사를 이용하려는 사람에게도 친절과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까? 아니면 감정이 내키는 대로 싫은 눈치를 팍팍 내거나 아니면 싫은 티는 내지 않지만, 은근슬쩍 피하는 것입니까? (남의 사정이라고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마음(감정)에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사람에게 친절과 예의를 갖추는 것을 사랑이 아니라 위선적이거나 가식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이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성경의 말씀은 아무런 의미도 필요도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감정만 진실하고 솔직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감정과 다른 행위나 행동을 위선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말씀을 따라 믿음과 의지로 비록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의를 갖추고 친절과 배려를 베푸는 것이 정말 위선이고 가식일까요?
감정은 그냥 느끼는 것인데 감정을 옳고 틀림 또는 바르고 나쁨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감정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위선적이며 가식적이라고 단정합니다. 하지만 내 감정에 들지 않으면 다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감정은 그냥 느끼는 것입니다. 취향의 문제이고 감각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절대로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감정과 감각이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며 잘못된 것이며 악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롬7:18-19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만약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나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내 맘에 쏙 드는 사람을 만나는 우연이나 행운이 절대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이 형제나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려는 선한 의지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감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앞에서 대다수 교인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내 이웃일까?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랑이 자신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베풀 대상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자기 주변에는 사랑을 베풀만한 내 마음에 쏙 드는 이웃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웃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누가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이웃인가를 찾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려는 사람 즉 나의 문제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복된 삶을 살도록 인도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생겨나는 능력이며 선한 의지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므로 한 번뿐인 인생을 존귀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