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대신 자존감을 세우라
마태복음 22:37-40
오늘은 “나를 바로 세우기(나를 사랑하기)” 시리즈 두 번째 시간으로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존감을 회복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맺으며 살아야 하는 세 가지 관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이 세 가지 관계를 어떻게 세워가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관계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관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과도 바른 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못된 자기 기준과 잣대로 하나님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제멋대로 규정하고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웃과 바른 관계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한 첫 단계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존귀하게 여기는 자존감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존감을 세우기보다 자존심을 앞세우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사전에 따르면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생각이나 감정”이라고 합니다.
자존심이 센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동을 합니다. 한 마디로 자존심이 센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맞추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자존심이 센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자존심을 채우려는 사람은 상반된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우월감을 가지고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에게는 열등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자존심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바로 세우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자존감은 무엇입니까?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자존심이나 자존감이나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니 그게 그거 아니냐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존심(pride)과 자존감(self-esteem)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자존심은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지만, 자존감은 다른 사람과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기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들, 이미 자신의 가치를 자기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합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삭개오의 이야기는 자존심과 자존감에 대한 매우 적절한 사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가는 길마다 가득가득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려는 무리 속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삭개오에 관해 소개하기를 세리장이며 부자라고 소개합니다. 삭개오가 살던 당시 여리고는 큰 국경도시였고 향료의 산지였기 때문에 거둬들이는 세금의 양도 어마어마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리고의 세리장은 막강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과 결탁하여 정해진 세금의 서너 배를 더 거두어서 대부분 세리는 부자였습니다.
눅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또한 누가복음은 삭개오에 관해 소개하기를 키가 작은 사람이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남들보다 키가 심히 작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선 모여든 무리 사이에서 무리의 맨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키가 작은 삭개오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키 크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나기를 한참이나 하다가 오히려 무리 뒤편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눅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키가 남들보다 턱없이 작아서 사람들에게 밀려 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이미 어려서부터 수없이 되풀이하여 겪어 온 것입니다. 삭개오는 어린 시절 필시 “난쟁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무시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업신여기고 놀리던 사람들에게 복수하여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로 인해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삭개오의 마음에 강하게 든 생각이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높은 권세와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면 사람들이 키 작은 자신을 더는 무시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조국을 배신하고 로마제국의 세리가 된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세리가 된 삭개오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악착같이 일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세금을 거두어 로마제국에 바쳤습니다. 그 보상으로 그는 마침내 여리고 지역의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 지역에서 알아주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누구도 이전처럼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내심 실로 통쾌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비록 뒤에서는 어떤 욕을 하더라도 그의 앞에서는 설설 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나무 위에 오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리고의 세리장이 되고 부자가 되었어도 삭개오의 자존심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세리장이 되고 부자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심한 미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으로도 자신이 모은 소유로도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한 삭개오는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불리는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틈에 끼어 예수님이 지나가시기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예전과 똑같이 키 작은 자신을 무시하며 아무도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밀려난 삭개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자신의 작은 키를 대신해 줄 크고 높은 나무에 오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오른 삭개오의 모습은, 예상할 수 없었던 돌발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삭개오는 큰 나무에라도 올라 예수님을 보아야겠다는 간절함으로 나무에 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키 작은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수많은 무리를 향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분노의 마음으로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는 그곳에서 정말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에 서더니 그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늘 매국노, 죄인, 난쟁이로 부르며 아무도 그를 제대로 된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눅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있어야 하겠다고 하시니
하지만 예수님께는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며 속히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겠다고 하십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의로운 사람, 순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는 말씀은 비록 다른 사람들은 너를 알아주지 않지만, 나는 너를 안다. 너의 아픔과, 너의 눈물 그리고 네 영혼의 감추어진 의로움과 순수함을 보시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다가섬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경험을 체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높은 나무 위에서 올라가서는 위세를 부릴 이유가 없는 그런 관계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 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고 감싸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약한 것, 부족한 것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려와 도움의 기회를 삼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리 삭개오의 집에서 하룻밤 묶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에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실 자리가 아니라는 불만의 웅성거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머물 수 없다는 불만의 목소리였습니다.
눅19:7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 갔다."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불만과 원망의 수군거림은 곧 놀라운 탄성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강탈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삭개오는 자존심이 센 사람에서 자존감을 회복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눅19: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곧 예수님의 축복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삭개오의 변화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이 삭개오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집 전체를 포함한다는 선언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를 살리게 된 것입니다.
눅19: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말씀을 마칩니다. 나를 바로 세우고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자존심 대신 자존감을 세워가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정말 소중하고 가치 있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부모님도, 남편이나 아내도, 자식도, 목사도 아닌 오직 우리를 창조하시고 복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우리를 존귀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힘입어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여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