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마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
시편 51편 16-17절
오늘은 “나를 바로 세우기(나를 사랑하기)” 시리즈 네 번째 시간으로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실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자신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여기에서부터 사람이 맺는 모든 관계가 뒤틀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자인 Joseph Luft와 Harry Ingham은 인간의 심리와 내면에 관한 오랜 연구를 통해 인간의 자아 혹은 속사람(내면)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이 연구는 두 사람의 이름을 조합하여 흔히 조해리의 창(Joe + Harry =Johari’s window)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자아에는 크게 네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알고 남도 알고 있는 부분(open), 두 번째는 나는 알지만 남은 모르는 부분(hidden), 세 번째는 나는 잘 모르는데 남에게는 잘 보이는 부분(blind), 마지막 네 번째는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unknown)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첫 번째 Open 영역은 내가 알고 남도 아는 부분은 밝은 대낮에 사람들과 만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만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첫 번째 부분입니다. 주로 자신이 남들에게 보이거나 자랑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Hidden 영역은 나는 또는 내 가족은 알지만 다른 사람은 잘 모르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크게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부분은 다른 사람 모르게 은밀하게 하는 선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모르는 긍정적인 것들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있다면 벌써 다른 사람에게 자랑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알지만 남은 모르는 부분은 주로 남에게 감추고 싶어 하는 부정적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남들이 알면 부끄러운 것들 남들이 알면 수치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남들 모르는 나만 아는 자신의 중대한 실수나 죄 또는 시시때때로 탐심, 미움, 죄 등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첫째 Open 부분과 둘째 Hidden 부분만을 자기의 전부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는 자기의 겉모습을 꾸미고 치장하는 일에 자신을 멋지게 보이는 일에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알 수 없는 자기만 아는 부정적 부분은 감추기 위해 더욱 철저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데 남들에게만 그럴듯하게 멋지게 신실하게 보이려는 삶은 예수님은 뭐라고 경고하였습니까? 외식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외식하는 삶과 신앙에 대해 엄중한 경고와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외식을 그토록 엄중히 경고하셨습니까? 외식하는 신앙에는 신앙을 통해 누려야 하는 진짜 변화와 구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마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마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세 번째는 Blind로 나는 잘 모르는데 남에게만 잘 보이는 부분입니다. 얼핏 그런 게 있을까 생각합니다. 어떻게 나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을 남이 더 잘 알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듯이 자신이 볼 수 없지만 남들에게만 잘 보이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그 사람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재능이나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본인은 모릅니다. 그래서 남들이 다 아는 자신의 가능성을 거부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자신의 가능성을 발휘하지 못하며 삽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자기는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은 자기를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늘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지만, 남들에게는 허풍쟁이로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은 남들을 잘 배려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남들이 보기엔 대단히 이기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남들에게는 잘 보이는데 정작 자기 자신만 알지 못하는 점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만 볼 수 없는 부분을 알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일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Unknown 사람은 누구나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애써 이 부분을 축소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물론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나도 모르고 남도 잘 모르는 잠재의식의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뇌과학자들도 우리의 뇌에서 잠재의식의 비율의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공통된 의견은 잠재의식은 최소한 5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프로이트와 같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잠재의식이 90%나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자신에 대해 자기가 알고 있거나 아니면 남이 알고 있는 첫째, 둘째, 셋째 영역을 다 합해도 한 개인에 대해 절반조차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재의식은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왜 영향을 끼치는지는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잘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훨씬 더 오래 살았음에도 여전히 한국 사람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훨씬 많음에도 여전히 한국말이 편하고, 한국 음식이 좋고, 한국의 예절과 문화가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잠재의식이 우리의 감성과 느낌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해리의 창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 많이 알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또한 내가 아닌 남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기 위해서는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모르는 나를 알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어야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도 이전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나무의 나이테에는 나무가 살아온 햇수만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살면서 겪은 홍수나 가뭄과 같은 위기에 대한 기록도 남는다고 합니다. 나무가 나이테에다 자신이 겪은 모든 경험을 남기듯 사람도 살면서 경험한 모든 사건이나 기억을 우리의 뇌에 기록한다고 합니다. 어떤 것들은 사람이 의식하고 기억할 수 있는 공간에 기록합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것들은 사람이 의식하고 기억할 수 없는 잠재의식의 공간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뇌에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은 우리 뇌에서 보관의 모습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을 의식에서 잠재의식으로의 변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사람의 뇌에 남겨진 기록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이 경험한 사건이 잠재의식으로 변환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경험한 사건이 의식 속에 보관될 만큼 강력한 인상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경험한 사건이 수치스럽거나 고통스러워서 그 기억 자체를 스스로 억눌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수치스럽거나 고통스러워 강제로 억지로 잠재의식으로 이동시켰다 해서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남아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또는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의식하지 못하는 기억이나 경험들이 훨씬 더 많이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또는 성격에 영향을 줍니다.
이처럼 감추어진 내면의 상처는 겉으로는 잊어버린 것 같고 사라진 것같이 보이지만,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비록 기억할 수 없는 잠재의식의 세계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현실의 삶에 영향을 미쳐 우리의 삶을 불행하고 힘들게 합니다. 성격이나 인격, 인간관계 심지어는 신앙생활 등 모든 부분에 걸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줍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발견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숨기고 감추고 억압하여 잠재의식의 공간으로 내어 쫓는다고 우리가 받은 상처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치유 받지 못한 마음의 상처는 끊임없이 우리를 발목을 붙잡고 늘어져서는 사사건건 우리의 삶을 방해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상처받은 영혼들입니다. 상처 없는 인생은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아플 때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과 기억에 남은 상처 역시 치유 받아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가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치료의 시작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워서 상처 난 마음을 감추려고 합니다. 숨기려고 합니다. 외면합니다. 억압합니다. 하지만 외면하고 회피하고 억눌렀던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상한 심령 상처 난 마음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상처 난 우리의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치유하시고 회복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51편 17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신앙의 여정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