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과 우월감이란 상한 감정의 치유
마태복음 25:14-18
오늘은 “나를 바로 세우기(나를 사랑하기)” 시리즈 여섯 번째 시간으로 “열등감과 우월감이란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 시간에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치유되어야 하는 상한 감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가 하는 대단히 이성적 생각이며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존감은 무의식적 반응인 감정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이성적으로는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적 생각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자기 비하나 멸시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존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감정을 잘 이해하고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날씨와 같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시애틀 날씨는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한순간에 변할 수 있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시애틀 날씨는 변화무쌍한 감정의 변화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기분 좋게 시작한 하루가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순식간에 망치기도 합니다. 반대로 우울하게 시작한 하루가 누군가의 칭찬 한마디나 친절로 최고의 날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지극히 감정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는 감정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영어로 Emotion이라고 합니다. Emotion은 Energy+Motion을 합친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감정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결코, 전부가 아닙니다. 감정은 내가 사용하는 에너지일 뿐입니다.
이것을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으로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이 나오느냐에 따라 내가 타고 있는 자전거의 속도가 결정됩니다. 화가 나거나 불안한 날은 빨리 갈 것입니다. 반대로 허무나 우울한 감정이 나오면 천천히 갈 것입니다. 하지만 자전거는 속도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핸들을 잘 조정해야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습니다.
속도가 감정에서 나오는 에너지라면 핸들을 조정하는 것은 이성에 속한 것입니다. 감정이 우리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고 적절히 대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존감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기상예보관은 날씨를 조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날씨를 파악해서 맑은 날은 옷을 가볍게 입고 흐린 날은 우비를 챙기라고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생겨나는 감정을 없애거나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시도는 다 실패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쑥 드는 감정에 불만스러워합니다. 마치 맑으면 햇살이 강해서 싫고, 비가 오면 습해서 싫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는 사람의 힘과 능력을 벗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때때로 변하는 날씨에 맞춰 대처하는 것입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생겨나는 감정을 없앨 순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에 생겨난 감정에 맞춰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존감에 대해 말하면서 감정에 초점을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존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바른 생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의식적 반응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의식적 반응인 감정을 잘 다루기 위해선 내 마음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감정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추운지 더운지, 지금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를 알아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날씨에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습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불쑥 드는 감정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탁월한 인격이나 영성을 가졌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예수님도 때론 슬퍼하며 눈물 흘리기도 하셨고 불의한 일을 볼 때 분노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에 일어난 감정을 잘 대처하는 것은 철저하게 이성적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을 잘 대처하는 첫 출발은 지금 내 마음에 든 감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생겨난 감정이 질투인지 열등감인지, 불안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마음에 일어난 감정에 대해 가장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무의식적인 반응인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만듭니다. 이것을 상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열등감은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상한 감정입니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열등감으로 인해 상처 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열등감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두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천적인 조건들에 의한 열등감입니다. 주로 외모나 지능에 관한 열등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굴이 지나치게 큰 사람들은 얼굴에 대해 열등감을 가집니다. 눈이 매우 작은 사람들도 눈에 대한 열등감을 가집니다. 키가 작아도 열등감을 가지고, 얼굴이 못생겼다는 열등감도 있습니다. 지능이나 타고난 선천적 능력도 다 여기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는 후천적인 조건에 의한 열등감입니다. 이것은 환경에 의해 생겨나는 열등감입니다. 가난한 형편의 사람들은 부자들을 보며 열등감을 가집니다. 소위 말하는 명문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은 이름 있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을 보며 열등감을 가집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을 보며 열등감과 좌절에 빠집니다.
그런데 열등감이 만들어지는 두 가지 통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비교입니다. 열등감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생겨나는 마음에 새겨지는 감정의 상처입니다. ‘나는 못생겼어.’, ‘나는 무능해’, ‘나는 가난해’ 그래서 지레짐작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할 것으로 생각하고는 남들보다 먼저 스스로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열등감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의 비극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와 다른 사람이 받은 달란트와 비교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는 무려 육천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까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입니다.
그런데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별거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까? 자신은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 다른 종은 두 달란트 어떤 종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있었습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니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는 돈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마25:15 주인은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각각 맡기고 여행을 떠났다.
사람들이 열등감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비교 의식입니다. 남들과 자꾸 자신을 비교함으로 스스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능력이나, 실력보다 더 많은 것을 갖기를 원하게 됩니다. 욕심이죠. 그리고 잘 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세상을 비관하면서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열등감으로 실패한 인생을 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사울 왕이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목동 출신의 청년 다윗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도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울 왕의 열등감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다윗과의 비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상18:7-8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그렇다면 열등감 대신에 우월감을 가지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요? 많은 사람이 열등감과 우월감이 정반대되는 감정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우월감 역시 열등감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상처 난 감정입니다. 우월감도 열등감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마음에서 나온 상처 난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주로 겉으로 드러난 것들 예를 들자면 외모나 학력, 자동차나 집 크기 같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런데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누구보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월감 역시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나온 열등감의 또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자기가 더 뛰어나다는 우월감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순식간에 열등감으로 바뀌게 됩니다. 남들과 비교를 통해 얻은 우월감은 자기보다 더 나은 것을 지닌 사람을 만나게 되면 순식간 열등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월감도 열등감처럼 비교를 생겨난 상처 난 감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등감이나 우월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자아상을 만드는 것만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열등감이나 우월감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어떻게요? 자기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굴종적이거나 비굴해집니다. 반대로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고 군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치와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서 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가치의 기준을 내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면 환경이나 조건이 바뀌지 않아도 관계없습니다. 신체장애, 외모, 가난, 학벌, 세상에서의 실패가 자신을 열등감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남들보다 더 학벌이 좋다고 남들보다 더 성공했다고 남들보다 더 돈이 많다고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나”라는 존재를 존귀하게 하는 것은 내가 남들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나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자존심을 세우거나 우월감에 사로잡혀 남을 무시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열등감과 우월감이란 상한 감정을 치유하고 이런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길 원한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을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대신에 하나님만을 유일한 가치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나를 지으시고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자신의 가치와 기준을 둘 때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그대로 나를 사랑하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