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의 치유와 극복
창세기 3:7-10
오늘은 “나를 바로 세우기(나를 사랑하기)” 시리즈 여덟 번째 시간으로 “죄책감의 치유와 극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마음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관한 두 가지 상반된 주장 가운데 여러분은 어떤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가지 다 맞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에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생각하는 마음 다른 말로는 이성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대단히 부유한 환경에서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대단히 가난한 환경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에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느끼는 마음 다른 말로는 감정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이라는 마음은 내 생각이나 믿음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마음인데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당황해하거나 좌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이라는 마음은 왜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제멋대로 인가요? 감정이란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생리적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감정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감정을 내 마음대로 조절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감정을 바꾸거나 감추고 숨기려 하기보단 나에게 나타나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이란 나도 잘 모르는 숨겨진 자기의 내면을 드러내는 신호와 같습니다. 비록 내가 원치 않는 감정이 불쑥 올라온다고 해도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보다는 내 내면에 이런 마음이 있었는가를 깨닫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발생하고 나타나는 감정에 대해 함부로 옳은 감정, 나쁜 감정으로 나누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는 우리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감정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 자체가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감정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대처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 살펴보았던 열등감이나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죄책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열등감이나 죄책감이 들면 대부분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열등감이나 죄책감이란 감정에 대해서 나쁜 감정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옳은가요?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저절로 나타나는 감정에 대해서 비록 그 감정이 당장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한다고 해서 나쁜 감정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됩니다. 열등감이나 죄책감이란 감정도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꼭 있어야 하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편하고 고통스럽다고 나쁜 감정 또는 부정적 감정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런 감정을 억압하거나 차단하게 만드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열등하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열등함을 인정하고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으면 됩니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열등하다는 것은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열등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열등감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된 원인이 된 것이 무엇입니까? 동생 아벨에 대해 열등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게 되면 어떤 일들이 우리의 내면에서 벌어집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지은 다음 어떻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숨기거나 아니면 도망쳐 숨어버립니다. 죄를 감추고 숨기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진 가장 본능적이며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뺑소니 사고가 수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지만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감추고 숨기거나 도망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의 실수나 죄를 감추거나 도망쳤다고는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은 더 큰 죄책감이 들기 시작합니다. 죄책감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저지른 일이 또는 자신이 품은 생각이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아픈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왜 죄책감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비록 다른 사람은 모르게 완벽하게 감추고 숨겼다 해도 자기 자신은, 자기 양심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양심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양심을 주신 하나님을 결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책감이란 잘못이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잘못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물론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죄책감이란 감정을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는 죄책감이 있기에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매우 심각한 잘못이나 중대한 실수를 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성경은 이것을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양심에 털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리학에서는 아예 자기의 행동이 잘못인지도 모르는 사이코패스나 자기가 잘못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소시오패스라고 합니다.
딤전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이처럼 자신이 저지른 실수나 잘못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야 하는 것까지도 심각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이나 책임이 아닌데도 자신이 감당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문제까지도 마치 자기 책임인 양 불필요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교통사고나 예상치 못한 재난으로 자식이나 가족을 잃은 엄마가 이게 모든 자기 죄 때문이라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자책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부족해서 자식의 출세나 성공을 뒷바라지 못 한다는 죄책감에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의 기대나 배우자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습니다.
일자 샌드라는 덴마크의 심리학자는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당신에게”라는 책에서 죄책감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우리의 행동에 견주어 누가 보아도 적절한 정도의 죄책감을 합리적인 죄책감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정확한 원인이 없는 죄책감이나 인종, 성별같이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된 죄책감을 비합리적인 죄책감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신앙적 차원에서도 적절한 죄책감은 잘못된 삶에서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교회에선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는 철저하게 자기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인 죄책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죄책감은 우리를 잘못된 신앙이나 이단 사이비 신앙에 빠지게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시한부 종말론 신앙입니다.
삯꾼 목사들은 의도적으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교리를 오용하여 교인들에게 불필요한 죄책감을 사로잡히게 만들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죄책감으로 인한 두려움에 빠진 교인들은 사소한 어려운 일이 생겨도 심지어 부엌에서 칼질하다 손을 베어도 하나님께서 벌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죄책감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가지게 되는 아주 보편적인 상한 감정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선언의 본질적인 의미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책감의 치유와 극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죄책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두 가지 죄책감이 있습니다. 정죄로 인한 죄책감과 책망으로 인한 죄책감입니다. 정죄는 죄를 드러내고 비난하여 수치심과 처벌의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면 책망은 죄를 깨닫게 하야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죄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책망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우리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책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완벽하고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열등한 존재이며 동시에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늘 실수와 잘못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누구도 실수하지 않고 잘못하지 않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열등감과 마찬가지로 죄책감 역시 우리가 신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원초적 감정입니다.
따라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다만 죄책감을 느끼는 게 두려워 이를 피하려고 행동할 때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비록 죄책감이 당장은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느낌을 준다고 해도 함부로 죄책감을 차단하거나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추거나 피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책감을 차단하고 억압하거나 감추거나 피하는 것을 반복하게 되면 죄를 짓거나 잘못하고도 자신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꼭 필요한 죄책감마저 외면하게 되면 이런 사람은 결국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마저 스스로 차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죄책감이 들 때마다 숨기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말고 도대체 이 죄책감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정직하게 직시하고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나를 바르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책망인지 아니면 나를 고발하고 부끄럽게 만들어 낙심하고 좌절하게 하려는 사탄이 주는 정죄인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책감으로 인한 수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숨어 지내거나 자책하며 괴로움 가운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죄책감이란 원초적 감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책감이란 감정을 느끼게 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를 인간답게 살도록 도우려는 하나님의 책망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으로 죄책감을 치유하고 극복하며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