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주시는 사랑(수치심의 치유와 극복)
창세기 3:1-7, 21
오늘은 “나를 바로 세우기(나를 사랑하기)” 시리즈 아홉 번째 시간으로 “덮어주시는 사랑(수치심의 치유와 극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창세기 3장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심으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습니다. 하나님께 먹지 말라고 하신 나무 열매를 먹고 난 다음 아담과 하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저들의 눈이 밝아졌고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 선과 악을 나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선과 악에 대한 유일한 판단자이며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었던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스스로 선과 악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의 기준이 되실 때,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통치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되자, 선악을 자기를 기준으로 제멋대로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악이라 여기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된 결과가 무엇입니까? 악한 것을 선하다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사5:20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지금 전 세계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마스의 주장을 들으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너무나 비참하고 불쌍합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장을 들으면 이스라엘의 보복이 정당하게 여겨집니다. 저들의 전쟁은 이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나라로 나뉘어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우리의 비참하고 암담한 현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기 전까지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되면서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에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뜻(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제멋대로 이용하기까지 합니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이 아닌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나누게 된 이들이 가장 처음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이 가장 처음 경험한 것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눈이 밝아져 이들이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자신들이 벗었다는 사실과 이로 인한 부끄러움 다른 말로 수치심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처음부터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벗은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추거나 숨길 것도 부끄러울 필요가 없는 관계를 나타내는 메타포라 할 수 있습니다.
창2:25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기 전,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서로를 돕는 관계였습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긴장하거나 경계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둘은 둘이면서도 한 몸이었습니다. 아담의 유익과 하와의 유익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출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선악이 뒤섞여 싸우는 세상은 아니었습니다. 선악을 초월하는 세상이었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존재하고, 하나는 모두를 위해 함께 어울려 존재하는 그야말로 “공존 공생”하는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세상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조율된 세상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질서이자 인간과 자연이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방식입니다. 가장 완전한 방식입니다. 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서로를 돕는 온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메타포가 바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지자 가장 먼저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이 보인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 이익을 따라 남을 판단하고 이용하려는 자신들의 욕심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탐욕이 드러나자 아담과 하와가 느꼈던 감정이 무엇입니까? 부끄러움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감추었던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이 가진 열등감이 죄를 짓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죄를 짓고 난 인간에게 생긴 감정에 대해서 창세기는 크게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난번 설교에서 살펴본 죄책감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부끄러움 다른 말로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죄책감과 수치심은 대단히 비슷하게 여겨집니다. 실제로 이 두 감정을 제대로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죄책감이나 수치심이란 감정을 잘 조절하기 위해선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책감을 조절하고 대처하는 방법과 수치심을 조절하고 대처하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조절하는 행위는 자동차 운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진 차를 가졌다고 해도 운전을 못 하면 무용지물입니다. 운전을 못 하면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멋진 차 때문에 심지어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술은 물론이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추게 하는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떤 버튼을 조작해야 실내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지, 자신이 가려는 방향을 표시하는 방향지시등은 어떻게 조종하는지, 비가 오면 창문에 맺힌 빗물을 닦는 장치가 조종하는 법도 알아야 합니다. 깜깜한 밤에 운전하려면 라이트 켜는 방법도 알아야 하며, 어떻게 시동을 켜고 끄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자동차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감정도 자동차 운전과 매우 비슷합니다. 감정이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에너지이지만 감정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안전하게 잘하기 위해선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고 그 감정의 특징은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감정들과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에 대해 이것이 어떤 감정인지를 구분하고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정은 철저히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반응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통제가 힘듭니다. 하지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이성적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감정을 구분하고 구별하는 데서부터 감정을 조절하는 가장 중요한 첫 출발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얼핏 대단히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둘은 큰 차이가 나는 감정입니다. 죄책감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다른 사람에게 들키거나 들킬 것 같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죄책감은 자신의 양심에 대한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타인과의 관계에 관한 감정입니다. (기생충)
죄책감과 마찬가지로 수치심은 사람을 대단히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자기 기준대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사람에게는 수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수치심이 없다면 세상은 사람들이 도무지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는 지옥과 같은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맹자 무수오지심 비인야)
물론 수치심은 열등감이나 죄책감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자기의 실수나 잘못 또는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약점이나 속내가 드러나는 것을 대단히 고통스러워합니다. 오죽하면 이불킥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입니다. 심지어 수치심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수치심도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가치 중립적입니다. 따라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고 조절하느냐에 따라 자신을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긍정적 감정이 될 수도 있고 이전보다 못한 사람이 되게 하는 부정적 감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다루는 이성적 능력인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지극히 이성적인 능력입니다.
수치심은 자칫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수치심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에게 가장 먼저 수치심을 느끼게 하신 것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수치심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감정이기에 다른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수치심이 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수치심은 열등감이나 죄책감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감정이기에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들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심각하고 중대한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려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은 금세 마르기에 저들의 수치를 제대로 가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주셨다고 창세기는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수치를 온전히 덮어줄 수 있다는 메타포입니다.
창3:21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주셨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의 실수나 수치를 드러내기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서 자신을 돋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자신을 돋보이기는커녕 함께 진흙탕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실수나 허물 그리고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벌거벗은 자기의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겨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심으로 저들의 수치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는 남들에게 들키면 부끄러울 것이 많은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부끄러움이 드러났을 때 그들의 부끄러움을 감춰주고 덮어주는 사랑만이 수치심이라는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바라기는 덮어주는 사랑으로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잘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