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두려움의 치유와 극복)
창세기 3:8-13
오늘은 “나를 바로 세우기(나를 사랑하기)” 시리즈 열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두려움의 치유와 극복)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됩니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는 특정한 인물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 또는 남자를 뜻하는 단어이고 하와는 생명 또는 어머니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말씀은 우리는 모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전까진 침침했던 눈이 잘 보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며 눈이 뜨였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사춘기 이전에는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이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남자가 남성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여자가 여성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성을 사귀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좋아하는 이성을 보면 가슴이 콩닥거립니다. 이럴 때 비로소 ‘이성에 눈을 떴다’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전에는 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보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어떤 눈을 뜨게 된 것일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사람이 자기의 이익이나 욕심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기 전까지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눈을 뜨자 하나님 말씀과 뜻을 따르며 사는 존재에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러한 사람의 변화를 눈이 밝아졌다는 말씀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눈이 밝아지기 전까지 이들은 벌거벗고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눈이 밝아지자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벗은 몸을 가렸습니다. 벗은 몸을 가렸다는 것은 저들에게 수치심이 생기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에게는 수치심만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수치심은 곧 어떤 감정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정말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찾을 수 없어서 이렇게 물은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숨었는지 잘 아시면서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은 “네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라는 것을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하나님 음성을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대답합니다. 이전에는 벗었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벗을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두려움이 된 것입니다.
창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기 이전에는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살았음에도 아무런 부끄럼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사이에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감추고 숨길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지자 가장 먼저 자기들이 벗었다는 것이 보였고, 하나님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는 아담의 대답은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그리고 하나님을 보는 눈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서로의 필요를 돕는 관계였습니다. 서로를 돕고 사랑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는 긴장하거나 경계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감추거나 숨기지 않아도 부끄러울 것도 두려운 것도 없는 그런 관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이익과 욕심에 눈을 뜨게 되자 이전과는 다르게 상대방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나를 이용하려는 상대방, 자신이 이기기 위해 나를 짓밟으려는 상대방,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나를 속이려는 상대방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한 몸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는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두려워 피하고 숨는다는 것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해 숨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으신지요? 언제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두려워한 이유는 하나님 말씀과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가 스스로 자신이 신이 되어 자신들이 나눈 선과 악을 따라 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독교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왜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고 묻자” 아담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자기 잘못이나 책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떠넘깁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마저 깨뜨리고 만 것입니다.
창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것은 하와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여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그러자 하와도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자기의 욕심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기의 모든 책임을 뱀에게 떠넘깁니다. 이것이 눈이 밝아져 스스로 선과 악을 나뉘게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담은 아담대로 하와는 하와 대로 자신만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창3: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생겨 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오해가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을 나누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생각과 주장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주장은 틀렸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늘 갈등이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 생각과 주장만 옳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 대신 자기가 기준이 되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자기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생각과 주장만이 선하고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더 크고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 때는 하나님 말씀과 뜻을 따라 살 때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난 다음에 생겨난 감정이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들 때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지금 내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사람의 감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직접 개역 개정 성경으로 검색해 보았는데 부끄러움 즉 수치심은 134번 분노 320번 그런데 두려움은 무려 518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가장 많이 휩싸이는 감정은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치심에서 두려움으로 발전한 것처럼 대부분의 부정적 감정은 두려움으로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잡혀도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깊은 죄책감이 들어도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수치심이 들여도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인정받지 못해도 두려운 마음이 들고 왕따당해도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실패해도 두려운 마음이 들고 심지어 성공해도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돈이 없어도 두려운 마음이 들고 돈이 많아도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아파도 두려운 마음이 들고 건강해도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늘 두려움이 따라다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하나님이 되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완벽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실수가 있고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이란 감정은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하나님의 경고 사인과 같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자료를 찾다 보니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365번 나온다고 글이나 설교가 꽤 많았습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이 나오는 것은 1년 365일 하루에 한 번씩 들려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합니다. 대단히 은혜롭고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검색해 보니 성경에는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88번 나옵니다. 영어 성경도 비슷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말이 유행하게 되었는가 찾다 보니 2006년에 개봉한 Facing the Giansts(믿음의 승부)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과 “두려워하라” 말 가운데 어떤 말씀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습니까?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88번 나오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무려 171번이나 나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어떻게 해야 늘 우리를 따라다니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 말고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만사 모든 것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진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일4:18(새번역)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이 두려움을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우리를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두려움을 능히 극복하며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