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갑이을(怒甲移乙)
(분노의 치유와 극복)
창세기 4:3-8
오늘은 “나를 바로 세우기(나를 사랑하기)” 시리즈 열두 번째 시간으로 “노갑이을”이라는 제목으로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분노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지키게 하시고, 에덴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나무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금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사람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창2: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갖은 수를 다 쓴다고 해도 사람이 결코, 하나님과 같아질 수 없는 가장 결정적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사람에게,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장치이며 방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을 품고 살아갈 때만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진실은 저들은 더 이상 에덴동산에 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3:23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왜 더 이상 에덴동산에 살 수 없었습니까? 에덴동산이 무엇에 대한 메타포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이루며 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아져서는 자기의 뜻과 기준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뜻만 허용되는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떠난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입니다. 가인에 의한 아벨의 죽음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인간 최초의 죽음입니다. 아벨의 죽음은 대단히 억울하고 불의한 죽음이었습니다. 억울하고 불의한 아벨의 죽음은 스스로 하나님이 된 사람이 만들어내는 억울하고 불의한 세상에 대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에덴동산입니다. 사람이 살아야 할 곳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이 뭐에 대한 메타포라고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에덴동산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기 멋대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기준을 따라 살아갈 때 에덴동산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 또는 하나님의 뜻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기에 나의 기준이나 내 뜻과 다른 것입니까? 스스로 하나님이 된 사람에게 선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유리한 것,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나에게 좋은 것이 선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악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불리한 것,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 나에게 나쁜 것이 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모든 사람이 서로 돕고 사랑하며 공의와 공평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와 공생하고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에게 악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위해 서로 싸우고 다투고 죽이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세상의 방식인 약육강식, 승자독식이 하나님에게는 악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자신들이 수고한 것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지은 농산물을 제물로 바쳤고 동생 아벨은 자신이 치는 양 떼 가운데 태어난 첫 번째 새끼의 기름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자기의 제물은 거절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가인의 분노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인간 최초의 분노입니다. 가인이 드러내고 있는 분노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가인은 자기 뜻대로, 자기 기대대로 되지 않으니까 분노한 것입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을 받아주시는 것이 옳은 것이고 자기의 제물을 거절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분노하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우리는 모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내 뜻이나 내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화가 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화가 날 때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면 분노로 인해 파생하는 실수나 죄는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리고 있는 가인에게 경고하십니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그 죄를 잘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시는 경고 말씀에 성경 최초로 ‘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따르면 죄는 사람의 영혼의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사람을 지배하려는 괴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창4:7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우리말 성경이 죄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하타(hata)입니다. ‘하타’라는 히브리어의 본래 뜻은 ‘주어진 길에서 벗어난다.’ 또는 ‘과녁에서 벗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길이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벗어나 하나님의 길을 가려는 가인의 모습이 그의 인생을 파괴할 것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죄가 가인을 지배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의 경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인은 어떻게 합니까? 동생 아벨 들판으로 데리고 가서는 죽입니다.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잔인하게 죽입니다.
창4:8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분노 역시 생각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그리고 자동으로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노의 감정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화가 난다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화를 제대로 풀지 못하거나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풀려고 하니까 실수하거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누구 때문에 화가 났습니까?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않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누구에게 자신의 분풀이를 했습니까? 동생 아벨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왜 하나님이 아닌 아벨에게 분을 풀었습니까? 하나님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만한 동생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죽인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죽입니다.
분노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죄가 있습니다. 작은 강아지는 큰 개를 만나면 미친 듯이 짖어댑니다. 그런데 강아지가 아무리 옆에서 짖어대도 큰 개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는 자기의 두려움을 분노로 감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화가 나면 대부분 소리를 질러댑니다. 분노로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함입니다.
가인이 분노는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지만,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분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지만,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려워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를 풀지 못한 가인은 자기보다 약한 아벨에게 분노를 쏟아 낸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같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이전까지 그토록 친근하였던 하나님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3:10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가인이 하나님께 따지고 물었다면 그는 동생을 잔인하게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따지고 묻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에게 따지고 묻지 못했습니다. 결국 풀지 못하고 억눌렸던 가인의 분노는 결국 자기보다 약한 아벨에게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가인이 가졌던 분노는 동생을 잔인하게 죽일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분노를 풀지 못하고 억누르다 보니 결국 자신의 분노를 동생 아벨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으로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화는 무조건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적절하게 드러내는 것이 참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엡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풀지 않은 분노는 절대로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경고하는 분을 품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품은 분노는 결국에는 폭발하고 맙니다. 그래서 화는 참기보다는 적절하게 푸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화를 드러낼 때는 다른 감정보다 더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분노라는 감정은 다른 감정과는 달리 너무나 강력하고 파괴적이어서 심각한 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뭐예요? 노갑이을입니다. 노갑이을은 갑에게 받은 노여움을 을에게 푼다는 사자성어입니다. 비슷한 한글 속담으로는 뭐가 있습니까? 노갑이을은 분노라는 감정이 죄를 짓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자기보다 힘센 사람으로 인해 분함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또는 엉뚱한 사람에 푸는 것은 그 자체로도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하지만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갑으로 인한 분함을 을에게 표출할 때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받은 분함보다 갑절 이상으로 자신의 분을 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분노는 엉뚱한 사람에게 풀려고 할수록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분노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잔인하게 쳐서 죽이는 것은 이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화는 반드시 쌓아두지 말고 풀어야 합니다. 하지만 엉뚱한 사람에게 분노를 풀려고 하다 보면 결국은 가인처럼 심각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는 지혜롭게 화를 풀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따지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따지고 물을 수 있냐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께 따지고 물어서 자신의 분노를 해결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욥입니다. 선지자 요나도 하나님께 화를 냈지만, 하나님은 노하지 않으시고 그가 내는 화를 다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노를 받아주십니다. 들어주십니다. 인정해주십니다.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