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람답게 만드는 세 가지 관계
마가복음 12:29-31
ⓢ오늘은 나를 바로 세우기 시리즈 열세 번째 시간으로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 세 가지 관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발견하고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맺어야 하는 중요한 세 가지 관계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맺는 세 가지 관계에서 우리 인생과 관련된 모든 가치 이른바, 인생의 행복, 삶의 의미와 목적, 인생의 보람 등이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면서 맺어야 하는 세 가지 관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관계가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다음으로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숨겨진 또 다른 관계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막12:30-31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관계에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순서입니다. 관계에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인생이 꼬이고 뒤죽박죽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순서가 꼬였기 때문입니다.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에 문제가 생기가 갈등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관계의 우선순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다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순서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의 기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내가 더불어 사는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기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는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는 사람은 절대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인지, 그리고 나아가 무엇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져서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막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하나님과 관계 다음으로 사람에게 중요한 관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때만 인생의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며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로 죽고 못 살아 결혼한 부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자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입니다. 아들은 낳을 땐 1촌, 대학 가면 4촌, 군에서 제대하면 8촌, 장가가면 사돈의 8촌, 애 낳으면 동포, 이민 가면 해외 동포라고 합니다. 잘난 아들은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빚쟁이 아들은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장가간 아들은 큰 도둑이고 며느리는 좀도둑 손자들은 떼강도라고 합니다.
죽고 못 살아 결혼한 부부는 물론이고 피붙이 자식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든데 하물며 피도 섞이지 않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확실한 축복의 통로이지만 동시에 사람이 살면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처의 통로가 되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고 상처를 주고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 뜻대로 상대방을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은 상대방에게 함부로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사람이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잘 지내기 위해서 상대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며 또한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자아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아상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내면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자아상을 가져야 비로소 다른 사람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아상이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내면의 모습이지만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자기 스스로 자아상을 알지 못합니다. 마치 자기 얼굴이지만 자기 얼굴을 자기가 직접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내 얼굴이지만 내 얼굴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울과 같은 반사체에 자기의 모습을 비쳐야만 볼 수 있습니다.
자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자아상이란 것이 자기 내면의 모습이지만 자기 스스로 내면의 모습을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의 얼굴을 보기 위해선 거울이 필요한 것처럼, 자기 내면의 모습을 보려면 자기의 내면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추어진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자주 만나고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말과 태도와 반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일 수 있고요, 학창 시절엔 친구나 선생님일 수 있고요, 어른이 되어선 회사의 동료나 배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인이면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우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자신에게서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자기 자신을 보는 자아상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 가는 자아상에는 문제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도 나라는 사람의 내면을 정확하게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나은 부모라 할지라도 자기를 온전히 비추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자기의 자아상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하게 만드는 사람은 부모인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부모가 자식을 독립된 존재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명분을 앞세워 자식을 자신의 아바타쯤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 주는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잣대로 자녀의 자아상을 왜곡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바른 자아상을 회복하길 원한다면 나라는 가치 기준을 태초부터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자신을 판단하는 기준을 누구에게 두는 가가 중요합니다. 나를 평가하고 나의 가치를 정하는 기준을 태초부터 나를 계획하시고 태중에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둘 때만 비로소 가장 올바른 자아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사야 44: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통해 우리의 내면과 존재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다른 사람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 대한 정확한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대신에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하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기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사람들이 ⓢ명품이라고 하는 사치품에 많은 돈을 지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입고 들고 먹는 명품이라는 값비싼 사치품이 자신을 남들보다 돋보이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값비싼 명품을 걸치면 너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할까요? 이렇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값비싼 물건을 걸치고 두르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값비싼 사치품을 걸친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요?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할까요? 부러워할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둘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보이지 않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인격,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성품 그리고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신실한 믿음과 영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명품만 좋아하지 말고 명품 신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이 명품이 주는 만족보다 훨씬 더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 명품 신앙을 가지는 대신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돋보이게 하려고 신실한 척, 거룩한 척, 인격자인 척 흉내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가짜 신앙, 흉내 내는 신앙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외식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성경에서 외식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에 의해서 처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외식하는 신앙을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로 여기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외식을 심각한 문제로 여기신 것일까요? 외식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흉내만 내는 짝퉁 신앙이지 결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외식하는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망가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다 망가뜨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외식하는 신앙에 대해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심각하게 그리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받아들이시는 것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것은 우리가 남들보다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자녀 삼아주시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의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더 상처 많고 실수많고 죄 많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막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흉내나 내는 가짜 인생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척 신실한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부족한 인격과 성품 그래도 회의하고 의심하는 신앙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됩니다.
정직한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이웃을 품어주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변화가 나타나며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