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홀로서기
창세기 32:24-30
오늘은 나를 바로 세우기 시리즈 열네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 앞에 홀로서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발견하고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혼자 있으면 유난히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괜찮은데 혼자 있으면 공허해합니다. 불안해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자기의 진짜 모습을 직면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혼자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직면해야 하는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두려워 혼자 있으려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서 자신만의 공간으로 도망쳐서는 숨어서 살아갑니다. 깊은 산속으로 도망치기도 하고 가상의 세계로 도피하기도 합니다. 혼자 있으면 유난히 불안해하는 사람도 문제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얼핏 보기에 혼자 있으면 유난히 불안해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사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정반대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두 부류의 사람이 가진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두 부류의 사람 모두 홀로서기를 못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생존할 수 없는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생명체,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완벽하게 주지 않았습니다. 다른 생명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가 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필요를 도우며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홀로서기입니다. 사람은 혼자 설 수 있어야 비로소 함께 설 수 있습니다. 홀로서기가 안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힘듭니다. 홀로서기가 안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짐만 되기 때문입니다.
박재순이란 분이 쓴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남이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내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고 내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나답게 될수록 더불어 사는 길로 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홀로 하는 것이면서 온 세상과 더불어 하는 것이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홀로서기를 할 때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사는 목사로서 홀로 설 수 있어야 하고 성도는 성도로서 홀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가 늘 교인들에게 의존하려고 하면, 교인이 늘 목사에게만 의존하려고 하는 교회는 절대로 제대로 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각자 홀로서기가 제대로 될 때 비로소 교회는 든든히 서게 됩니다.
숲속에 가면 나무들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홀로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무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홀로 서 있지만 함께 어울려 있기에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홀로 서지 못하고 쓰러져 여기저기 쓰러져 있거나 다른 나무에 기대어 있으면 숲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홀로서기가 된 나무가 함께 모여 아름다운 숲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생은 홀로서기입니다. 인생뿐만 아니라 신앙도 홀로서기입니다. 신앙이 왜 홀로서기입니까? 비록 우리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를 통해 함께 믿음의 길을 가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는 단독자로 홀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홀로서기를 잘해야 합니다. 홀로서기를 잘할 때 비로소 함께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예배드리고 있지만, 동시에 각자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인과 아벨이 함께 예물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물만 받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예배를 다 받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동시에 각자가 자기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아침 묵상 끝에, 기도를 하고는 왜 다른 목사님들처럼 ‘아멘’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교우들을 위해 기도를 할 수는 있지만 그 기도에 ‘아멘’을 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교우들에게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기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지만 그 기도에 아멘하고 안하고는 여러분의 믿음에 달린 것입니다.
이삭의 둘째 아들 야곱은 고향인 브엘세바를 떠나서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이유로 형 에서를 피해 도망쳐야 했습니다. 타향살이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야곱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도망쳐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고향을 향한 야곱의 발걸음은 기쁨보다는 무겁기만 합니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형 에서와의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보다 앞서 종들을 형 에서에게 보내어 은혜 입기를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종들이 가져온 소식은 형 에서가 군사 사백 명을 거느리고는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것입니다.
종들이 전한 소식을 들은 야곱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오고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대로 넋 놓고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술수와 잔머리로 일생을 살아온 야곱은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랠 작전을 세웁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짐승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세 그룹으로 나눈 짐승들을 세 번에 걸쳐서 형 에서에게 주면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야곱은 끝까지 진솔하게 형에게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잔머리와 술수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창32: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하지만 야곱은 막상 세 번에 걸친 뇌물작전을 준비하고도 도무지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형 에서가 당장이라도 쳐들어와서는 자신과 가족들을 모두 죽일 것만 같았습니다. 야곱은 한밤중에 일어나서는 곤히 자고 있던 두 아내와 식솔들을 깨워 얍복강을 안전하게 건너게 하고는 홀로 얍복 강가에 남았습니다.
고향을 떠나 지난 20년 동안 야곱은 숱하게 어렵고 힘든 밤을 많이 보냈습니다. 하지만 야곱에게 오늘 밤보다 힘든 밤은 없었습니다. 두 아내도 열한 아들도 그리고 그 많은 재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홀로 남아 인생은 철저히 혼자라는 것을 자각한 것입니다. 인생은 혼자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 비로소 야곱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홀로서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창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홀로 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홀로서기란 자신의 인생을, 자기의 운명을, 자기의 감정을 그리고 자기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기대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오로지 나의 것이라는 깨달음을 통해 내 인생의 주도권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가져오기 위한 노력입니다.
홀로 서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따라 기분과 행동이 널뛰기하는 것처럼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함께 어울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기분과 태도가 비교적 일정합니다. 그래서 함께 잘 어울릴 수 있습니다.
홀로서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을 잘 알고 다루는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다룰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마음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이미 지나간 과거와 같은 것은 내 힘으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 내 마음은 내가 다스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홀로 설 줄 아는 사람은 내가 바꿀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에 힘과 에너지를 쏟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자신의 모든 힘과 에너지를 쏟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기가 능히 다스릴 수 있고 바꿀 수 있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자신의 힘과 에너지를 쏟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완전한 곳이기에 자기 실수나 잘못이 아니어도 예상치 못한 재앙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함께 어울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갈등과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불완전한 세상과 불완전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휘둘리는 불안한 인생,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홀로 설 줄 아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하고 다룰 수 있기에 자기 삶에 대한 주도권을 주변 상황이나 환경에 뺏기지 않습니다. 어려우며 어려운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형통하면 형통한 대로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도 능히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을 이것을 자족하는 마음이라고 했고 자족하는 마음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물론 홀로 선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이 웬만한 영성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도 처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누구나 쉽게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홀로서기는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수도 없이 넘어집니다. 넘어져서 다치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부모는 넘어지는 아이를 곧바로 세워주지 않고 혼자서 일어나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아이가 홀로 서서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이는 넘어지면서 일어나는 것은 배웁니다. 넘어지지 않고 홀로 서는 아이는 없습니다. 넘어지는 훈련을 통해서 혼자 서고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장애아를 둔 모든 부모의 소원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식보다 단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부모들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기에 마음은 너무나 아프지만 장애를 지닌 자녀가 부모가 없이도 홀로 설 수 있도록 다른 부모들보다 더 혹독하게 자녀를 훈련 시킨다고 합니다.
사고로 시각장애인이 된 아내를 둔 남편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늘 아내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아내와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불치의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더는 아내와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내는 혼자서 지팡이를 의지해서 다녀야 했습니다.
비록 사고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남편이 도와주었을 때는 큰 어려움이 없이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더는 자신과 함께 다니지 않자 모든 것이 힘들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부딪치기도 하고 넘어지게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을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숱한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이 없이도 원하는 곳을 찾아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매일 같이 타던 버스를 타는데 운전기사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아주머니는 참 든든하시겠어요. 남편 되시는 분이 언제나 뒤에서 함께 해주니까요” 아내는 그제야 남편이 자신의 뒤에서 항상 동행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달려가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원망할 때도 홀로 눈물을 삼켜야 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야곱에게 네가 이겼다고 선포해주셨습니다. 야곱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져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철저한 외로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홀로서기를 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게 되자 그동안 그토록 두려웠던 형 에서가 더는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인생도 신앙도 홀로서기입니다.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할 수 없고, 내 신앙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도 부모가 대신할 수 없고 남편이 아내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며 각자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홀로 설 수 있을 때만이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 인생과 내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홀로 설 수 있을 때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좋은 부부로 살기를 원한다면 먼저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지속하며 지내길 원한다면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먼저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