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가짜 하나님 버리기4-공포 목회가 만든 공포의 우상 극복하기

공포 목회가 만든 공포의 우상 극복하기

마가복음 9:43-47

 

오늘은 가짜 하나님 버리기시리즈 네 번째 시간으로 공포 목회가 만든 공포의 우상 극복하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한 공포의 우상에 대해 살펴봅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우리의 생각 깊은 곳에 뿌리내린 하나님에 대한 공포의 우상을 극복하려는 영적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지배하거나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부패한 권력이나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은 사람들을 노예화하거나 속박하려고 할 때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를 사용합니다. 부패한 종교 역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사람들을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심판과 멸망,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이미 제가 몇 번 반복하였던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던 교회에서 있었던 사건인데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충북 음성의 문암리라는 아주 외진 시골에서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94년이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섬겼던 교회에 연씨 성을 가진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집사님이신데 교회는 거의 나오지 않으시는 분이셨습니다. 가물에 콩 나듯 어쩌다 한 번씩만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몇 번을 심방을 하고 전화를 드리며 예배 참석을 권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만 대시며 교회에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사님이 주일 예배에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가물에 콩 나듯 어쩌다 한 번 나오는 날인가 보다 여겼습니다. 이제 한 번 교회에 나왔으니 당분간은 또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 집사님이 주일 저녁 예배도 나오시고 수요일 예배도 나오시고 심지어 새벽예배에도 매일 나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그렇게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던 적은 그 교회가 생기고 나서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매 주일 그분 형편에 과하다 할 정도의 헌금도 하셨습니다. 놀랍도록 변화된 집사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마침내 제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생각하며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집사님 모습을 보면서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어 보였습니다. 분명 무언가 중요한 이유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작심하고 집사님께 변화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시내를 다녀오는데 버스터미널에서 심상치 않게 생긴 사람이 다가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대뜸 말하길 액이 꼈어, 올여름을 넘기기 힘들 거야.” 하더랍니다. 집사님은 너무 꺼림칙해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 관상을 보니 올여름 죽을 운명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8월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놀란 집사님은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죽을 운명을 바꿀 수 있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뜸 큰 굿을 해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큰 굿을 하려면 얼마나 필요하냐고 묻자 백만 원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연락처를 주고는 꼭 굿을 해야 살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집사님은 불안한 마음에 정말 백만 원을 들여 굿을 해야 하나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백만 원은 지금도 적지 않은 돈이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돈이었습니다. 수일을 고민하다가 명색이 교회 집사인데 이참에 교회나 열심히 나가자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의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교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과연 그 집사님이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8월을 넘길 수 있을지가 교회의 최고 관심사가 된 것입니다. 마치 그 집사님과 교인들은 하나님이 더 센지 무당이 더 센지 확인해보자는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그 집사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며 그날로 교회 문을 닫아야 할 분위기였습니다.


교인들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 8월이 가까울수록 그 집사님만 초조해지는 게 아니라 저까지 신경이 쓰이고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마다 나오는 집사님을 위해 매일 간절히 기도해 드렸습니다. 심지어 그 집사님에게 찬물로 샤워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혹시 찬물로 샤워하다가 심장마비라도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저 역시 심각한 두려움에 빠졌던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8월이 지나갔습니다. 그 집사님은 어떻게 되셨을까요? 물론 아무 사건도 사고도 없이 무사히 잘 지나갔습니다. 그렇다면 그 집사님은 그 이후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셨을까요? 아니요. 8월이 지나자마자 또다시 이전과 똑같이 가물에 콩 나듯 심심하면 한 번씩 교회에 나오시곤 하셨습니다.


제가 나중에 그 집사님이 하신 헌금을 계산해 봤습니다. 그 집사님이 얼마를 헌금하셨을까요? 정확히 50만 원을 하셨습니다. 굿 하는 비용의 반띵을 헌금하신 것입니다. 이걸 보면서 어쩌면 그 집사님이 정말 무서웠던 것은 100만 원이라는 굿판 비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무속인은 정말 그 집사님에게 닥칠 불행을 미리 알고서 경고해 준 것일까요? 아니요. 저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속인은 왜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말을 지나가는 사람에 한 것입니까?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해 굿판을 벌이고 굿판으로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과연 그 집사님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요? 그리고 이것이 단지 미신과 관계된 이야기일까요? 아니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속신앙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는 인간이 가진 두려움과 공포라는 원초적 본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왜 인간이 가진 두려움과 공포라는 원초적 본능을 이용하는 것일까요?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하는 것이 당장은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집사님의 경우처럼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두려움과 공포의 요인이 사라지게 되면 더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교회에 붙잡아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전보다 더 큰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주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두려움과 공포심을 자극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서워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생활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니요. 저는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해봐도 이런 주장에 단 1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과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벌주시는 공포의 신으로 여기는 사람이 과연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하는 종교 노예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과 공포를 초월하는 참 자유인으로 구원하시려고 하는데 정작 교회는 교인들을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해 종교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포의 신이라는 개념은 죄를 예방하고 회개의 부름을 위하여 지금까지도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포의 신으로 여기게 하는 종교 교육은 오랫동안 교인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교인들을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게 만든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죽음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지옥에 연관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을 죽음 이후의 영원한 형벌인 지옥에 연관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교회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중세 이후 계속된 교회의 지옥에 대한 오남용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지옥에 대한 내성이 생기게 했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커녕 사후세계에 대한 경계심마저 희미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심판이나 지옥에 대한 경고는 사람들을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심판이라는 단어가 207번이 나옵니다. 멸망이라는 단어는 199번이나 나옵니다. 그렇다면 지옥이라는 단어는 몇 번 나올까요? 개역 개정에는 겨우 13번만 나옵니다. 그것도 구약 성경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신약 성경에만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 기록된 숱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경고를 영원한 형벌인 지옥과 연관시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경고 대부분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삶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죽어서 가는 지옥보다 더 무서운 것은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생지옥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옥에 관한 직접적인 말씀조차도 죽어서 가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강조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는 지옥이 세 번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초점은 지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생에 들어가는 것, 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있습니다.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물론 심판과 멸망 그리고 지옥에 대한 강조는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방법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를 지나치게 강요하는 공포의 목회가 만든 최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움과 공포의 우상으로 왜곡하고 변질시켰다는 것입니다. 공포 목회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긍휼의 하나님을 단 하나의 작은 죄도 놓치지 않고 반드시 벌주고 심판하는 엄격한 심판관의 모습으로 왜곡시켜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하나님을 누가 믿고 의지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공포라는 원초적 본능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생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원초적 본능도 있습니다. 인간은 공포와 의미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더 높은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고 이루기 위해 두려움과 공포라는 원초적 본능을 초월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라면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 복음이라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박해와 핍박의 두려움, 심지어 죽음의 공포마저도 초월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했다고 해도 두려움과 공포는 여전히 인간의 원초적 본능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끊임없이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를 극대화해서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거나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은 인생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는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이 주는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참 자유와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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