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가짜 하나님 버리기5-공포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공포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요한일서 4:7-12

 

오늘은 가짜 하나님 버리기시리즈 다섯 번째 시간으로 공포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계속되는 가짜 하나님 버리기 시리즈 설교를 통해 알게 모르게 만들어진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버리고 진짜 하나님을 찾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누구나 하나님에 대하여 우상적 형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욕망이 만들어 낸 우상적 형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신념이 만들어 낸 우상적 형상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나 절박한 상황이 만들어 낸 우상적 형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책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해 만들어 낸 우상적 형상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잘못된 생각과 믿음이 만들어 내는 하나님에 관해 왜곡된 잘못된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우상적 형상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고 위축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를 억압과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를 공포와 두려움 불안과 죄책감에 억눌려 살게 합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에게 퍼져 있는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우상적 형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공포와 두려움의 형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이 사람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낱낱이 묻고 따져 벌을 내리시는 공포와 심판의 신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교인들의 체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세뇌를 이루어진 것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으로 너무나 많은 교인이 하나님을 우리의 작은 실수와 잘못조차도 용서하지 않으시고 벌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 넘어져도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깁니다. 자식들에게 문제가 생겨도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교통사고라도 나거나 병이라도 걸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게 얼마나 우습다 못해 어리석은 생각이고 자학적인 믿음입니까? 그런데 이런 말에 너무나 많은 교인이 너무나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신앙생활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 노예 생활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신앙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잘못된 줄 알면서도 잘못된 믿음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험하고 체험한 하나님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체험하고 고백한 하나님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경험한 하나님을 하나님에 대한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신비하고 무한하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다양한 하나님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사실(Fact)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알 수 없는 신비하고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에 대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각자에게 계시 된 또는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삶으로 경험으로 믿어야 하는 분이지, 지식으로 머리로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목사와 교인, 심지어 과학자 중에는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려고 무리한 억지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것이 오히려 요즘 세대들에게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사게 만든다는 것을 모릅니다.


창세기는 물론이고 성경은 과학적이며 역사적 사실(fact)을 기록한 말씀이 아닙니다. 대신에 성경은 하나님 창조에 나타난 영적 의미와 가치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교인이 성경을 과학책이나 역사책으로 여깁니다. 기독교 신앙을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믿음은 기독교 신앙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믿음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에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중력의 법칙을 믿는다고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고 믿지 않으면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나요? 우리의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중력의 법칙은 언제 어디에는 존재하는 법칙입니다. 다만 우리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중력의 법칙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닫는 것이 믿음의 영역인 것입니다.


얼마 전 12. 12 사건을 다룬 서울의 봄이란 영화가 개봉하여 1,300만 명 넘는 사람이 관람했다고 합니다. 12.12 사건은 우리의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어떤 사건으로 해석하고 바라보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믿음에 해당하는 영역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와 자연에 담긴 영적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고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찾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추구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이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설명은 무엇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최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누가 저에게 성경 66권을 단 한 단어로 요약하라고 하면 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이 믿는 하나님을 가장 잘 소개하는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요한 1서의 가르침입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일4:16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성경 최고의 계명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3:34-35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을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사랑에는 믿음이 절대적입니다. 비록 사랑을 과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사랑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사랑을 실천하느냐 외면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과 그 사회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교회 용어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 역시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행위에 포함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 사랑을 외면하고 배제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관한 생각과 개념을 왜곡하는 우상적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24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고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으면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요한일서 4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요일4:7-8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에게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실체도 없는 영적 가치이며 의미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의미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변화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권면한 다음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여기에 나오는 사랑은 모두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에 불과합니다. 비록 그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모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사랑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라 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더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그 사람의 뺨에 입도 맞출 수 있는 실제적인 물질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은 구체적인 말과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막연하고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그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여겨지는 사랑이 사람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행동으로 나타나면 사랑은 누구나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건과 경험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사건으로 만드신 사건이 무엇입니까?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사랑이 곧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을 두려움과 공포의 신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폭넓게 퍼져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잘못된 왜곡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가장 거룩한 존재를 가장 추하고 무서운 존재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영혼을 억압하고 위협하는 공포의 우상을 물리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두려움과 공포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뿌리내리고 있는 공포의 우상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할 때만 공포의 우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 때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종류의 두려움과 공포를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온전한 사랑만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고 체험하시어 우리를 억압하고 불안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공포의 우상을 능히 극복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요일4: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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