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의 하나님에서 자유의 하나님으로
마태복음 12:1-8
오늘은 종려주일과 부활주일로 인해 잠시 중단했던 “가짜 하나님 버리기” 시리즈 설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오늘은 가짜 하나님 버리기 열한 번째 시간으로 “금지의 하나님에서 자유의 하나님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우상적 형상을 극복하고 진짜 하나님을 찾아가는 믿음의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저의 첫 목회지는 충북 음성군 문암면에 위치한 문암교회였습니다. 첫 목회를 시작할 당시 저의 나이가 26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목회하며 섬겨야 했던 교인들은 대부분은 60이 훌쩍 넘은 할머니들이셨습니다. 할머니 집사님들은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총각 전도사가 시골에서 목회하는 것이 안타까우셨는지 늘 저를 제대로 대접해 주지 못해 미안해하셨습니다.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전이며 나물이며 고기 등 푸짐하게 음식을 가져오셨습니다. 아무 말씀 안 하시고 그냥 주시고 가시면 제가 아무런 고민 없이 맛있게 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을 놓고 가시면서 꼭 저에게 어제 드린 제사 음식을 싸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전도사님 대접할 수 있는 날은 제사 때밖에 없다며 죄송하다는 말씀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모태신앙인 저는 어려서부터 제사를 한 번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교회에서는 제사 음식을 먹지 말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교리와 신앙을 가르쳐야 하는 전도사를 대접한다며 교인들이 제사 음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일 아닌 사소한 문제이지만 당시에는 전도사가 제사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자칫 목사 안수받는 데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이 음식을 제가 먹어야 합니까? 아니면 먹지 말아야 합니까? 제가 제사 음식을 먹었을 것 같아요? 안 먹었을 것 같아요? 물론 할머니 집사님께서 가져다주신 음식을 고맙게 받기만 하고 먹지 않는 방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매번 제사 음식을 가져다주신 할머니 집사님을 위해 기도하고는 가져다주신 음식을 다 먹었습니다.
물론 제 행위는 엄격하게 따진다면 당시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다행히 교단에서 그 사실을 몰라서 목사 안수를 받는 일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제 신앙 양심에 문제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할머니 집사님이 가져다주신 음식을 받기만 하고 쓰레기통에 넣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제 신앙 양심에 더 큰 문제라고 여겼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전통과 형식 또는 교단의 교리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에 얽매어 신앙이 주는 자유를 잃어버린다며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금지하는 우상의 형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억압하고 강제하고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자유를 느끼십니까? 아니면 속박이나 억압을 느끼십니까? 어떻게 느끼냐에 따라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느끼는 자유만큼이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이고 수준입니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기독교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교인들에 대해 세뇌당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신앙은 사람의 생각이나 이성을 억압하고 세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 합니다. ⓢ특별히 세상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가치관이나 가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각과 더 높은 가치와 이상을 가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주는 자유입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며 살 때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할 수 없는 것이 많아지는 사람은 신앙에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 하는 것이 늘 힘들고 버겁습니다. 반대로 제대로 된 신앙인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을 통해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흔히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고도 합니다. ⓢ결혼하고 나면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아진 사람도 있지만 결혼하기 전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결혼에 행복이 달려져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결혼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사랑이 식었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져야 하는 관계가 부부관계인데 여기에 사랑이 빠지고 나면 남는 것은 부담스런 책임과 의무 그리고 속박 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해도 결혼하기 전보다 더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부담스럽고 힘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고픈 나머지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 그만 이삭을 잘라 먹는 일이 일어납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유대교 율법에 따라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도록 내버려 두냐며 예수님께 따지고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자주 위반하셨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이 엄격하게 지키던 안식일 법을 자주 위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바리새인들과 숱하게 논쟁하셨고 저들에게 미움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율법을 위반하신 것은 율법을 없어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이용해 백성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제멋대로 왜곡하고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욕심을 책망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따지고 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받드는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잘못된 믿음을 가졌는지 낱낱이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말씀은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자 당시 왕이었던 사울은 다윗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 왕은 전쟁 영웅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계획을 미리 알게 된 다윗은 당시 법궤가 보관되었던 놉이라는 지역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성소에 도착한 다윗은 도망하느라 며칠을 굶주려 있었습니다. 굶주린 다윗은 제사장에게 먹을 빵이 있으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에게는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보통 빵은 없었습니다. ⓢ대신 제단에 올리는 빵 성경에서 진설병이라고 불리는 거룩한 빵만 있었습니다.
진설병은 매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서 제단에 올려놓았던 빵이었습니다. 성물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빵 열두 덩어리를 만들어 제단에 차려 놓았습니다. 한 주가 지나면 새 빵을 갖다 놓았는데, 새 빵을 갖다 놓으면서 제단에서 물려진 빵은 오직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제단에 올려진 빵 진설병은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서 아무나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빵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윗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다고 율법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다윗은 너무나 굶주린 나머지 그것이라도 달라고 거듭 간청합니다. 주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성소와 성물을 소중히 지키고 보존해야 할 제사장 아히멜렉이 율법이 금지 규정을 위반하면서 굶주린 다윗에게 그 빵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이 문제는 성소나 성전의 시대가 아닌 수천 년이 지난 교회의 시대를 사는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도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다윗은 왜 율법이 금한 빵이라도 달라고 간청했고, 제사장 아히멜렉은 율법의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굶주린 다윗에게 진설병을 내어 준 것일까요?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규정이나 규칙으로 적용하지 않고 율법의 정신과 의도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인해 놉에 성전을 섬기던 제사장 85명이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소에서 율법이 금한 빵을 달라고 하는 다윗이나 그 빵을 주는 제사장 아히멜렉의 모습에서 배워야 할 영성은 할 수 있음의 자유 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의 규정과 규칙에 지금으로 하면 교리에 얽매이면 할 수 없는 것만 많아집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초점을 맞추면 이전보다 더 큰 자유 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본질은 갖가지 규정과 규칙으로 인간을 속박하고 억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인간을 속박하고 억압하는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들리어지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고 속박하는 말씀으로 변질시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다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이용하고 성경을 이용해 교인들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음’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뭐도 하면 안 되고 뭐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신 자유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도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창조주로 믿는 하나님은 자유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정말 자유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하나님으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이 더욱 많아져야 합니다. 이전에는 생각도 못 하거나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