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나?
행 24:16, 벧전 3:16
오늘은 가짜 하나님 버리기 열세 번째 시간으로 “어떻게 해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우상적 형상을 극복하고 진짜 하나님을 찾아가는 믿음의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 역시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 어떤 부당하고 불의한 강제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자유를 빼앗긴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곧 기독교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명령하거나 강제하거나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계명과 율법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구약의 계명과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입니다. 심지어 십계명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게 하려고 돌판 위에 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계명들을 반드시 지키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계명과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과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지난 두 주간 살펴보았던 자유의 하나님과는 모순처럼 보입니다. 명령하지도 강제하지도 복종을 강요하지도 않으신다는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계명과 율법을 주시고 이것을 지키게 하신 것일까요?
오랜 세월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계명과 율법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사람을 옭아매고 속박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왔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갖가지 종교적 교리나 규범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옭아매고 속박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 계명과 율법은 우리를 옭아매고 속박하고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계명과 율법은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며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계명과 율법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않고 사람을 옭아매고 속박하고 억압한다면 계명과 율법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용이자 왜곡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계명과 율법에 대한 교인들의 심각한 오해가 있습니다. 많은 교인이 계명과 율법을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계명과 율법을 주실 때 히브리 말로 일일이 계명과 율법을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다면 계명과 율법은 강제성을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규정하여 주신 것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계명과 율법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며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복종이 요구됩니다. 계명과 율법에 대해 이러한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계명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자유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명과 율법의 억압과 강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계명이나 율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명과 율법을 주셨다는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의 언어로 계명과 율법을 내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에 따라 모세가 사람의 언어로 전하고 기록한 것이 성경에 기록된 계명이고 율법입니다.
이것은 계명과 율법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에 적용되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성경 이해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시고 사람이 하나님께 들은 말씀 그대로 기록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감동을 따라 사람이 깨달은 것을 사람의 말과 글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 기록된 계명과 율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일일이 내려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감동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깨달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구약의 계명과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통한 발견이며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계명과 율법에만 해당하는 원리가 아닙니다. 신약에 기록된 여러 종교적 계율이나 규범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양심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을 기초로 해서 만든 교회의 교리나 종교적 규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양심을 통해 인간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직접 계명과 율법을 주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감동을 주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뜻인 계명과 율법을 발견하게 하시고 만들게 하여 이것을 지키며 살게 하신 것입니까? 계명과 율법이 또는 교리나 도덕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강제와 강요 또는 명령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들을 자발적으로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폭력이나 살인, 다른 사람의 소유를 도둑질하는 것, 자신의 이익을 위한 남을 속이거나 거짓 증거 하는 것이 비인간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성경의 계명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억지로 지켜야 하는 강제와 강요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자발적인 선택이며 순종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은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며 살게 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관용하며 특별히 약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가난한 사람 그리고 나그네와 외국인에 대해 자발적으로 친절과 배려를 하게 합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와 행동은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적인 삶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가는 것임을 발견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계명이나 율법은 우리를 강제하고 강요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따라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키며 살아야 하는 발견이며 깨달음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내 기분에 따라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발적으로 이웃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와 행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계명과 율법 또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들은 하나님의 강압으로 강제로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계명과 율법 그리고 도덕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감동에 따라 인간 스스로 만든 양심의 발견이며 깨달음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돌 판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더 깊숙하게 우리 내면 깊숙한 양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따라 살아갈 때 가장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로 인생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과 율법 또는 도덕규범들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이용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인간의 욕심이 스스로 자기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속이거나 빼앗으려고 하기에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단 한 가지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을 하십시오.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십시오.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의 형상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양심을 거슬러서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양심대로 행동하는 곳에 있습니다. 양심을 따르며 산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각자 자기의 삶을 온전히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자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 요소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24: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자유를 향한 부름은 우리의 과제이며 사명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성경은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자는 '또 다른 나'이기 때문입니다.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어떠한 형태의 강요나 강압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어떠한 형태의 강요나 강압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자유로운 존재인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유로운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으시고 명령하지도 않으시고 강요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 양심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소중하게 여기길 원한다면, 양심으로 비롯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함부로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벧전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계명과 율법, 종교적 규범과 규례는 우리를 옭아매고 속박하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에 따라 우리의 양심이 스스로 발견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지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화상 치료 중인 윤지호 집사랑 시애틀에 있는 병원에 물리 치료를 다녀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얼마 전 재판 문제로 검사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재판에 나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에 대해 증언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검사의 연락을 받고는 재판에 나가면 무슨 증언을 해야 하나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온몸에 끔찍하게 난 화상 자국을 볼 때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에게 엄중한 벌을 내려 달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판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도와주는 선량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을 다치게 한 사람을 용서하고 그에게 선처해 내려달라고 말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윤지호 집사가 얼마나 심각한 상처를 입고 지금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왔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그럴 수도 있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심각한 화상 자국에 팔을 움직이고 옷을 입을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다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이 아니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계명과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은 규정이나 규율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과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은 한마디로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은 자기 확신이나 자기 이익보다 앞서야 합니다.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은 신념을 따라 사는 것보다 사상을 따라 사는 것보다 앞서야 합니다. 심지어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은 믿음을 따라 사는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장 본질적인 삶의 자세이며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따라 사는 것만이 우리를 참된 자유의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