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을 자처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5:7-10,17
ⓢ오늘은 가짜 하나님 버리기 스무 번째 시간으로 “을을 자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서 을은 갑과 을이라고 할 때 약자인 을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계속되는 가짜 하나님 버리기 시리즈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우상적 형상을 버리고 진짜 하나님을 찾아가는 믿음의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주 작은 부분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우상적 형상을 버리고 진짜 하나님을 알아가길 원한다면 내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코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을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목사와 교인들은 자신이 아는 하나님을 마치 하나님의 전부인 양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가장 옳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아는 하나님과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정죄하고 비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아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믿는 확증편향에 빠진 종교 환자일 뿐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자기가 규정한 하나님을 뛰어넘어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을 믿는 대부분 종교나 신앙은 항상 사람이 먼저 신을 찾아 나섭니다. 왕이 신하를 찾아가지 않고 신하가 왕을 만나기 위해 왕궁에 들어가는 것처럼, 신이 먼저 사람을 찾지 않고 사람이 신에게 바칠 제물을 가지고 신이 있다는 신전을 찾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신에게 바칠 제물을 가지고 신을 찾아가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신을 찾아 나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룰 수 없을 때 사람은 자신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지닌 신을 찾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하나님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신과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은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심지어 사람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으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피하고 숨으려는 사람을 찾아내십니다.ⓢ
창3:8-9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믿음의 선조라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까? 아브람이 자기는 자식도 없고 자식에게 물려줄 땅도 없으니 자기에게 자식도 주고 땅도 달라며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가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브람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먼저 사람을 찾으실까요?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대부분 종교나 신앙은 자신이 믿는 신을 통해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을 믿습니다. 그래서 항상 사람이 먼저 신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통해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부르신 소명이나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은 더 이상 소명이나 사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이루고 싶은 소원을 하나님의 소명이나 사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다수 교회 역시 더 이상 자신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신들이 이루고 싶은 욕망을 비전이라고 포장하고는 비전을 이루려고 기를 쓰고 노력합니다. 여기서부터 기독교 신앙의 왜곡과 타락의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식을 달라고 간청했나요?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은 하나님께 가나안 땅을 달라고 간청했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길 가나안 땅을 주기 위해 아브람을 그가 사는 우르에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후손을 통해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창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자신이 먼저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은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 말씀에 아브람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제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요청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삼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동물들입니다. 삼 년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창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가져오라고 하신 희생제물을 가지고 와서는 동물들의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둘로 나누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습니다. 다만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반으로 쪼개기에는 너무 작아 둘로 쪼개기보다는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서로 마주보게 차려 놓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창세기가 기록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문화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일입니다. 하지만 동물들을 가져다 반으로 쪼개어 마주 보게 하고 쪼갠 동물들 사이를 사람이 지나가는 것은 아브람이 살던 시대 이전부터 그 지역에 내려오던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위한 의식이었을까요? 이것은 절대로 깨뜨려서는 안 되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언약이나 동맹을 맺을 때 사용했던 의식이었습니다. 둘로 쪼갠 짐승은 언약을 맺는 두 당사자를 의미하는 것이며, 둘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게 한 것은 언약이나 동맹을 위반했을 때는 둘로 쪼개진 짐승처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맹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운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맺은 언약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맺은 언약이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도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창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흔히 계약이라고 하면 을이라는 약자가 갑이라는 강자에게, 빚을 지는 사람이 빚을 주는 사람에게 약속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언약을 상징하는 둘로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누가 지나가야 할 맞습니까? 아브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이 갑이고 아브람이 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을인 아브람이 둘로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며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이 마땅해 보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을 맺는 사건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타는 횃불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창15: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약자가 되셨고, 빚진 자의 위치에 서셨다는 걸 의미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을 언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 앞에서 당신이 말씀하신 언약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브람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브람이 해야 할 맹세를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일까요? 약자가 해야 할 맹세를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일까요?
아브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몸소 둘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시며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부모는 자식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럼 부모는 왜 자식을 이기지 못합니까? 자식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맘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맺는 모든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기는 자가 누구입니까?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깁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있다면,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결코 이길 수 없어요. 이것은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생각하기를 사람이 하나님과 싸우면 하나님이 사람을 이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지십니다. 지나간 우리의 삶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이겨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사랑에는 매우 신비하고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당장은 항상 집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지고 또 지는데, 놀랍고 신비하게도 최후의 승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이며 사랑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최후의 승리이며 영원한 승리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슈퍼 갑이지만 절대로 갑질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히려 하늘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버리고 가장 비천한 곳에 가장 낮의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을 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나이 많은 교인들에게도 반말로 이거 하라 저거 하라 명령하는 목사나 장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을을 자처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목사나 교인이 갑질한다면 이런 목사나 장로는 믿고 걸러야 합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 역시 낮의 자의 모습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