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절실한 문제에 대한 시험
누가복음 4:1-4
오늘은 인생의 시험 다섯 번째 시간으로 “가장 절실한 문제에 대한 시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계속되는 인생의 시험 시리즈 설교를 통해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시험들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깨달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성숙해가는 영적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에 가셔서 받은 광야의 시험이라면 다른 하나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의 시험을 받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의 시험입니다.
눅4:1-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성령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려는 예수님을 준비하고 훈련하기 위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시어 그곳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매우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4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이나 훈련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금식하며 지내야 했던 40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위한 준비와 훈련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성령께서 인도하신 광야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 됩니다. 성령이 광야로 이끄시며 이끄시는 대로 가면 되고 금식하라는 감동이 있으며 금식하면 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것 말고는, 성령의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그 어떤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 나은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하고 훈련하는 성령의 시험에 들어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귀찮다고 힘들다고 손해가 된다고 성령의 이끄심을 외면하거나 거절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무시하니까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신앙의 성숙은 하나도 없고 늘 시험에 들어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며 훈련하실 때 마귀가 예수님의 훈련을 훼방하기 위해 시험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온 마귀를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이 마귀를 시험하는 자라고 표현한 것은, 마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의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마귀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대단히 기괴하거나 무서운 형상을 지닌 영적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마귀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입니다. 마귀를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귀의 시험에 번번이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시험하는 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혹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유혹하는 자가 무시무시하면 누가 유혹을 당하겠습니까? 보기만 해도 도망치려고 할 것입니다. 게다가 마귀를 영적인 존재라고 여긴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어떤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인간의 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를 무시무시한 모습을 지닌 귀신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과 상관없는 무속적인 생각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마귀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거나 대적하는 것을 뜻하는 히브리어 사탄을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마귀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을 뜻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이며 은유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위해 가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막아섰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신을 붙잡고 막아서는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하셨습니까? 자신의 탐욕을 위해 예수님께서 마땅히 가셔야 할 십자가의 길을 막아서는 베드로의 탐심을 사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사탄이나 마귀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도록 유혹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서 마귀나 사탄은 사람을 미혹하는 귀신과 같은 영적 존재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경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탄이나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탐욕이나 탐심을 의미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은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은 시험은 모두 세 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은 세 가지 시험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탐욕과 탐심에 관한 유혹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가지 마귀의 시험 가운데 첫 번째 시험에 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을 이해하기 위해선 첫 번째 시험이 어떤 상황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기록하기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어 대단히 굶주렸을 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눅4: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시어 굶주렸을 때 마귀가 찾아왔다는 것은,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여 굶주리셨을 때 마귀가 찾아와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시험했습니까?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광야에 널려 있는 돌들을 떡 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눅4: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시어 굶주렸을 때, 마귀가 굶주린 것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줍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굶주리지 않으셨더라면 마귀는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돌멩이만 보아도 먹을 것으로 보일 정도로 극도로 굶주린 상황에서 돌멩이를 가지고 떡 덩이로 만들어 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시험하는 자 마귀는 예수님이 처한 가장 절박한 상황을 이용해 예수님을 유혹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가장 절박한 상황이나, 절실한 형편일 때 마귀의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절박한 상황이나 절실한 형편일 때는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오랫동안 굶주리셨던 절박한 상황에 찾아와서는 가장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셨습니다.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굶주린 예수님에게 광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돌멩이로 떡을 만들어 당장 굶주림을 해결하라는 마귀의 유혹은 대단히 그럴듯한 말처럼 들립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 그리스도라고는 하지만 예수님 역시 우리가 똑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욕구를 가지고 살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욕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먹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모든 인간이라면 반드시 먹을 양식이 필요하고, 매일같이 양식을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생존의 법칙입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일지라도 먹어야만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적절한 양식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먹어야만 살 수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창조의 질서이며 원리입니다.
사람이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생존의 법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하나님 창조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생존의 법칙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과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는 존재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견디셔야 했던 40일간의 금식은 단순히 종교적이며 영적인 종교의식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광야에서 예수님의 40일간의 금식이 영적인 종교의식이었다면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시어 주리셨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주리신 것은 굶주림이라는 인간 세상에 가득한 고통을 직접 경험하시고 공감하시기 위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굶주린 예수님을 어떻게 시험했습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광야에 널브러진 돌멩이로 떡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유혹은 대단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돌을 떡으로 바꿀 능력이 없어서 문제이지 만약 우리가 예수님처럼 돌을 떡으로 바꿀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다면 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귀는 돌을 떡으로 만드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처럼 돌을 떡으로 만들면 당장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너무나 쉽고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유혹처럼 정말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 굶주림을 해결하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좋은 방법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굶주림의 고통을 몸소 경험하고 훈련하여 인간의 고통을 공감하게 하시는 성령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비한 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만약 40일을 굶주린 예수님께서 배고프다고 마귀의 유혹에 빠져 광야에 널브러진 수많은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었으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공생애 사역은 시작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40일을 굶주린 예수님을 찾아와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로 유혹하였던 마귀는 지금도 우리의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유혹합니다.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라 너무나 그럴듯한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편법을 쓰고 반칙을 하면 당장 쉽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라는 속담처럼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일수록 시간을 두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말로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기는 믿음의 사람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