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질서를 거스르는 믿음의 삶
누가복음 4:5-8
오늘은 인생의 시험 열 번째 시간으로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는 믿음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설교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방식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아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에게 향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험과 유혹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받으신 시험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시험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악마의 시험을 물리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으로 시험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굶주린 예수님에게 광야에 널브러진 돌로 빵을 만들라는 악마의 첫 번째 시험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첫 번째 유혹에 실패한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려가서는 세계 모든 나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눅4:5-6a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다음에,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주겠다.
악마가 예수님에게 준다고 한 모든 세상의 권세와 영광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에서 누리는 권력과 부와 명예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부와 명예는 대부분 사람이 가지고 싶어 가장 욕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준다고 하는 악마는 그냥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세상 권력과 부와 명예를 준다고 했습니까?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것입니다. 눅4:7 내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다.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악마의 요구는 단순히 악마에게 엎드려 절 한번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구절을 영어 성경은 “worship me”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Luke4:7 So if you worship me, it will all be yours." 자기를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인 삼아 자기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의 방식, 사탄의 방식이 무엇입니까? 강한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부와 명예를 독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고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권세와 영광은 자기의 손에 넘어왔다는 악마의 말은 허세나 과장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악마가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을 사자성어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고 합니다. 약육강식의 현상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큰 힘, 더 큰 권세, 더 많은 부를 가지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육강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장 강력한 질서와 원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대표적인 약육강식의 현상이 무엇입니까?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을 갈수록 가난해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입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이, 승리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독식 현상입니다. 부익부 빈익빈과 승자독식은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약육강식의 현상입니다. 물론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또는 장애인이나 소수자 차별 등도 대표적인 약육강식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약육강식이라고 하면 동물의 세계를 나타내는 자연의 질서쯤으로 생각합니다. 동물의 세계는 힘센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질서와 원리에 의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동물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약육강식의 질서를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 나타나는 약육강식의 현상 역시 지극한 당연한 창조의 질서로 여깁니다.
하지만 약육강식을 인간 세상의 당연한 질서라고 여기는 것은 매우 교묘하고 교활한 악마의 유혹입니다. 약육강식은 결코, 하나님의 창조 질서나 법칙이 아닙니다. 약육강식은 세상과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마귀의 방식이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물의 세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약육강식의 질서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아무리 힘이 세다고 약한 동물을 무조건 잡아먹지 않습니다.
육상 동물 가운데 코끼리는 가장 힘이 세고 덩치가 큰 동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센 코끼리이지만 자기보다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지 않습니다. 코끼리는 오직 풀만 먹으며 살아갑니다. 육식 동물만 다른 동물을 잡아먹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육식 동물의 세계도 무조건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처럼 동물의 세계는 결코 힘이 센 사자나 호랑이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살진 소나 양은 있어도 살찐 사자나 호랑이는 없습니다. 만약 힘이 센 사자나 호랑이가 동물의 세계를 지배한다면 동물의 세계에는 사자나 호랑이가 소나 말, 사슴과 같은 초식동물보다 훨씬 더 많아야 합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넓은 초원을 가득 채운 동물은 사자나 호랑이가 아닙니다. 소나 얼룩말 같은 초식동물들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약육강식의 세계라며, 사람도 동물이기에 사람 사는 세상도 약육강식의 질서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악마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처럼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질서에 의해 움직이고 유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질서로 유지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유지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이 센 사자나 호랑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사냥에 나서지 않습니다. 꼭 필요할 때만 사냥에 나섭니다. 게다가 힘센 사자나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사자나 호랑이에게 나 잡아먹으라고 자기의 생명을 맡기는 동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연약한 동물이라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보다 훨씬 강한 동물에게 도망치려고 끝까지 저항하며 발버둥 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독 사람은 힘센 사람, 권세 높은 사람, 돈 많은 사람이 괴롭히면 저항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저항할 수 없으면 도망이라도 쳐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경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먼저 납작 엎드려 힘센 사람, 권력 있는 사람에게 굴복합니다. 심지어 힘센 놈에게 바짝 엎드려 굴복하며 사는 것이 마치 대단히 현명한 처세술처럼 여깁니다.
과연 이것이 정말 현명한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인간의 역사에는 이런 식으로 힘 있는 자에게 바짝 엎드려 권력자의 떡고물로 자신의 욕심을 채워왔던 처세술에 뛰어난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에는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힘 있는 권력자에 맞서 싸웠던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나마 이만큼의 인간다운 권리를 누리며 살게 된 것이 누구의 덕분입니까?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약육강식이라며 힘센 권력자에 빌붙어 권력을 나누었던 처세술에 뛰어난 사람들 덕분입니까? 아니면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라며 힘센 권력자의 부당한 억압과 차별에 맞서 저항하였던 사람들 덕분입니까?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이용하여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악마가 앞세우는 가장 악한 세상의 질서가 바로 약육강식입니다. 약육강식은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 없는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대단히 교묘하고 교활한 유혹입니다.
악마를 경배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악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약육강식의 질서를 따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질서는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약육강식의 질서와 원리에 의해 유지되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11:6-9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이 새끼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곁에서 장난하고, 젖땐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마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원리는 약육강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힘센 사람이 자신이 가진 힘으로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권력이 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큰 부를 가진 사람이 자신이 가진 돈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마가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인 약육강식이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세상과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방식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이 사는 목적과 의미가 함께 어울리며 잘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적과 의미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악마를 경배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교인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정작 교인들 대부분이 원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교인들 대부분이 원하는 것은 비전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된 자기의 뜻, 자기의 자랑, 자기를 칭찬해 주고 인정해주는 나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자기가 높임을 받길 원하는 자기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유혹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악마의 유혹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위치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무엇을 위해 이런 것들을 욕심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권력과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섬김의 모습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이라는 세상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사랑의 힘을 선택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선택도 예수님의 선택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위해 악마를 경배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긍휼과 사랑의 힘을 위해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막강한 권세와 영광에 비하면 겸손과 긍휼과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초라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단 한 발자국이라도 이전보다 더 나아지게 만든 것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가신 겸손과 사랑의 길을 걸어갔던 믿음의 사람들 덕분이었음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 여정도 예수님이 가신 겸손과 사랑의 길을 따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