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출애굽기 20:1-2
십계명 강해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십계명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열 가지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형식에서 중요한 것은 십계명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언약이라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시내산 광야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전까지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이집트의 노예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주인과 노예 사이에는 계약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노예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십계명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방적 명령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 가지 계명을 지켜야만 너희를 이집트의 노예에서 구원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이미 이집트의 노예에서 구원받은 히브리인들에게,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방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신약에서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십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이 십계명이 가르치는 정신입니다.
십계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물론 십계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말씀은 출애굽기 20장 2절의 말씀입니다. 출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구절이야말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 가지 계명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너는 누구입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누구냐면 이집트의 노예였던 히브리 민족을 구출한 하나님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어떤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십계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배경을 들라고 한다면 출애굽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과 연결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출애굽 사건은 이집트에서 무려 430년간이나 종살이하던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던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사건입니다. 말이 쉬워 430년이지, 430년 동안 대를 이어 노예로 살았다면, 노예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을 기대했던 히브리 사람은 아마도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기대도 하지 않고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이집트에 보내 이 엄청난 일을 시작하셨습니까?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을 구하기 위해 선택하여 세운 사람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던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시고 만난 곳이 어디였습니까? 출애굽기 3장은 하나님의 산 호렙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3: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는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난 호렙산과 훗날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이 같은 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다른 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으로 나뉩니다.(개인적으로 저는 호렙산과 시내산이 같은 산인데 다르게 부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시고요.)
다만 이 말씀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를 부르시고 만난 곳이 어디였냐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왕자로 자랐던 모세가 보았던 이집트의 신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신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만나신 곳이 어디였습니까? 양 떼를 치는 목동들이 다니던 지극히 평범한 산 호렙산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는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성경은 주의 천사가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떨기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아십니까? 떨기나무는 우리가 사는 워싱턴 주에서 볼 수 있는 하늘 높이 치솟은 그런 나무가 아닙니다.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자라는 보잘것없는 가시나무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불에 타는데 순식간에 타버리고 말아야 할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소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멋지고 화려하고 웅장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보잘것없는 것을 뜻하는 떨기나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떨기나무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자 꺼지지 않는 불이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영적 도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떨기나무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 것은 세상에서 정말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전까지 세상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을 비추는 거룩한 불로 꺼지지 않는 불로 불타올랐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하찮게 여기는 호렙산에서 볼품없는 떨기나무에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이셨기에 이전까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살았던 이집트의 노예였던 히브리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타는 떨기나무로 임재하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 떨기나무의 형상을 촛대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메노라’라고 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봤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경이로운 마음으로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에 다가가자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출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있는 곳을 거룩한 땅이라며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간 곳이 어디였습니까? 평소 목동들이 양 떼를 몰고 다니던 호렙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양 떼를 모는 목동이 다니던 평범한 곳이 왜 갑자기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그곳이 어디라도 거룩한 곳이 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은 교회 건물이라고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때만 거룩한 곳이 됩니다.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는 곳이라도 그곳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면 그곳은 거룩한 곳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며 거룩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을 때 보잘것없던 호렙산이 거룩한 땅이 된 것처럼,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서 있다고 생각하면 이곳도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내가 서 있다는 깨달음과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일까요? 모세가 선 곳에 대리석이라도 깔아놓으신 것입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진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이기보다 일종의 상징이고 메타포입니다.
우리가 취직할 때 회사에 내는 서류를 이력서(resum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력서에서 ‘이’라는 한자는 신발 또는 발걸음을 뜻하는 글자이고, ‘역’은 지나온 자리를 뜻하는 한자입니다. 따라서 내가 신은 신발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것, 내가 옳다고 여겼던 생각이나 주장, 심지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을 그런데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벗으라는 거에요. 내려놓으라는 것에요.
내가 신었던 신발을 벗듯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내 모습, 내 자아, 내 생각이나 주장을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임재하시고 세상과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하시고 세상이 이루려는 것과는 다른 것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의무나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만 오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시어 사랑과 은총의 관계를 맺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단순히 교리나 규칙의 준수하는 것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여정이 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이 내 발의 신을 벗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존귀하고 거룩한 그리고 참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 아버지,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께 오늘도 우리를 죄와 두려움에서 자유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십계명을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으로 깨닫게 하시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세상이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고,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생각과 경험, 자아를 내려놓고 “신을 벗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