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출애굽기 20:1-2, 3:14-15
십계명 강해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같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십계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물론 십계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는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은 출애굽기 20장 2절의 말씀입니다. 출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구절이야말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 가지 계명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예에서 자유인이 된 히브리인들에게 십계명이라는 계명을 주시며 출애굽 사건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계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배경은 바로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들의 출애굽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이해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사는 히브리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모세가 다가서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출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진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이기보다 메타포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기 위해선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했던 것, 자신이 옳다고 여겼던 생각이나 주장, 심지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라는 메타포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임재하시고, 세상과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하시고, 세상이 이루려는 것과는 다른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자기의 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신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는 말씀에 담긴 메타포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하시겠다는 뜻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 백성이 누구입니까? 당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이집트인이 아니었습니다. 430년이나 저들의 노예로 살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저들을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구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저들을 구하려고 하신 것일까요?
출3:7 주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것은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너무나 잘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통받는 것을 보시고, 저들이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과 신음을 들으시기만 하고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저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출애굽기 가르쳐 주고 있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절박한 기도로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의 원통한 하소연,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나 울음소리도 간절한 기도로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전에 아내가 상준이랑 예은이가 갓난아기였을 때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옹알이 할 때, 저는 아무리 들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이들의 옹알이를 듣고는 무슨 말인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울음소리를 듣고도 그것이 배고파서 우는지, 아파서 우는지, 졸려서 우는지를 다 안다는 것입니다.
정말 아내가 다 아는지는 확인하지 못해서 모르겠는데, 저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꼭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울음소리도 심지어 우리가 차마 말로 표현하거나 고백하지 못한 것까지도 다 아시며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난 하나님이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저들을 구하기 위해 모세를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자기는 저들을 구하여 낼 능력도 없지만,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한다고 저들이 믿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나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는 말씀을 “나는 나다”라고 번역한 성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나다”라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경험이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큰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언어로는 도저히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이니까 제 나이만큼 하나님을 믿어왔습니다. 게다가 신학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목회를 한 햇수가 30년이 넘습니다. 30년 넘게 목회했으니 제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저 자신도 잘 모르는데, 감히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잘 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이건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하나님을 알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을 순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신앙인이 누군지 아세요?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매우 심각한 착각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다 안다고 착각하니까, 자기 생각, 자기 설교가 곧 하나님 말씀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머리로,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이나 우리의 상상이나 기대와는 상관없이 현존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뭐라고 생각하든 뭐라고 생각하지 않든,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현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생각 또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지, 인간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말씀하시면서 한편으로서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출3:7-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나의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았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고난을 알고, 세상에 내려가서, 건져내고, 인도하여, 데려가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뒷전에 서서 초연히 세상을 지켜만 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고통받는 백성의 고통을 보시고 들으시고, 같이 아파하시고, 내려오시고, 건져내시고, 인도하시어 마침내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시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또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출3:15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이 경험하였던 하나님, 이삭이 경험하였던 하나님, 야곱이 경험하였던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경험해가면서 조금씩 알아가야 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똑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경험과 영적 성숙에 따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달라집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이 쌍둥이 형, 에서를 속이고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면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야곱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자기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으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훗날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야곱은 또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이때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나서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에서 비로서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 사람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이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또는 “나는 나다”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히브리어로는 ‘야훼’라고 합니다. 개신교에선 ‘여호와’라고 합니다. 이 차이를 설명하자면 설교가 길어지니까, ‘야훼’와 ‘여호와’는 발음만 다를 뿐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이름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자기가 원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하고 계약서 쓰고 나오셨습니까? 아니죠. 자기가 원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춘기 청소년들이 부모에게 반항할 때 레파토리로 하는 말이 있죠. 뭐에요? “엄마는 도대체 왜 나를 낳아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은 세상에 무작정 던져진 존재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존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던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시고 저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저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불러내신 것은 이집트의 비참한 노예였던 저들을 거룩한 백성, 거룩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자유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거룩’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발적으로 지키는 계명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를 죄와 불의한 권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손을 붙잡아 주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세상의 억압과 불의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이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자유와 사랑의 길임을 깨닫고, 이를 지키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십계명의 정신을 따라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