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데오(Coram Deo)
출애굽기 20:1-3 신명기 6:4-5
십계명 강해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코람데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십계명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열 가지 계명입니다. 본래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강제하기 위해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오랜 노예의 삶에서 해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잘 지키며 살기 위해 다양한 종교적 규율과 규례들을 만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율법서에 기록된 대부분 종교적 규율과 규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러하듯, 시간이 흐르다 보니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가 왜곡되고 사람들이 만든 규율과 규례에 얽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십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 만든 종교적 규율과 규례를 잘 지키는 것이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잘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십계명은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 자유인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준으로 십계명을 주셨고, 그 첫 번째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의 시작을 알리는 선포라기보다,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 섬김으로 더는 불의한 권력이나 거짓 신들에 굴복하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초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막 자유인으로 광야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며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출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나는 너를 노예의 삶에서 구원한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첫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주시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출애굽의 은혜, 곧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은 다음에 우리가 지켜야 할 첫 번째 계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중요한 순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먼저이고, 계명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길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시는 계명을 잘 지키면 너를 내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원했으니 이제부턴 자유로운 내 백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계명으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고 하신 것은 강압적이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너희를 지배하고 통제하였던 가짜 신들과 부당하고 불의한 권세와 권력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며 살라는 것입니다.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모든 거짓 신들을 거부하고, 노예에서 해방하신 하나님만을 삶의 기준과 주인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물으신 첫 번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창3:9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하나님께서 정말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셔서 이렇게 물으신 것일까요? 아니요.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으신지 아시면서도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시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나누겠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후 성경은 두 사람의 눈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눈이 밝아진 이들은 자신들이 벗은 것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립니다. 그리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뒤로 숨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은 정말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피해 숨은 것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 앞입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 앞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보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더 이상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어버린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때 이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할 때 사람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깨지면 어떻게 됩니까?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등을 돌립니다. 마주 본다는 것은 사랑의 관계이며, 등을 돌린다는 것은 단절된 관계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맺어야 할 관계는 하나님과 마주 보는, 사랑의 관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 없이 살려는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숨은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이것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하려고 할 때가 언제입니까? 죄지었을 때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우선할 때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에 데리고 가서는 돌로 쳐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고 동생의 제사만 받았다는 이유로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도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았습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창4:9a 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셨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아벨이 어떻게 됐는지 몰라서 물으신 질문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어떻게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돌이켜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던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과 가인에게 하신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에 관해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관해 물으셨습니다. 가인에게 하신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으로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관해 묻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가인에 물으신 두 가지 질문 앞에서 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아담에게 물으신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이 하나님 사랑에 관한 우리의 책임을 일깨우는 것이라면, 가인에게 물으신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이웃 사랑에 관한 우리의 책임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가장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인간 됨을 이루어가기 위해 주신 계명이 바로 십계명이며 그중에서 하나님 사랑에 관한 계명으로 주신 것이 바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제1계명입니다.
하나님과 참된 사랑의 관계가 회복될 때, 불안과 두려움을 조장하고 사람들 사이에 편을 가르며 우리를 지배하려는 우상에게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상과 탐욕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룰 때,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차별이나 혐오, 착취가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다”라는 믿음은, 서로를 동등하고 존엄한 존재로 바라보게 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됩니다.
따라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첫 번째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들어 관계가 깨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안 되듯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세상의 우상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계명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씀이 신명기 6장 4-5절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기도 합니다.
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고 하셨을 때, 다른 신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참된 신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피하고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낸 가짜 신, 거짓 신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자기 욕심을 따라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은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는 우리의 탐욕에 대해 단호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내면의 우상들을 거부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계명은 종교 간의 경쟁을 부추기거나 다른 종교에 대한 배척을 요구하는 계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여러 신 중 최고의 신으로 으뜸으로 모시라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나뉘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매일 이 질문에 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코람데오의 자리에서 서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가치와 우상 뒤에 숨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가?
코람데오의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주시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고 누리며 살아가는 존귀한 인생 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외면하고 우리의 탐욕이 만들어 낸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등을 돌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배로 모일 때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네 이웃은 어디에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 듣게 하시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책임과 사명을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순간들을 지나가고 있는 교우들 있으면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