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출애굽기 20:4-5a, 23
십계명 강해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은 대단히 비슷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말고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계명입니다.
반면에 두 번째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것이 하늘에서 가져온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물속에 있는 것이든 간에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으로 사람들에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 사람에게 계시 된 것일까요? 사람의 생각, 사람의 상상, 사람의 지식 등 그 어떤 사람의 능력으로도 하나님을 한정하거나 규정하거나 제한할 수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순간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된 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신에 의해 사람이 지배당하고 속박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모양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엄중한 계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형상화하려고 시도하거나 눈에 보이는 우상에 마음을 빼앗기어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형상화하려는 이스라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형상을 지닌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반복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핍박받던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교회는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돋보이게 하려고 수없이 많은 조각과 상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신비한 능력이 있는 거룩한 형상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에 새겨진 조각상이나 만들어진 조각상에 마치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을 거룩하게 여기거나 교회 건물에 만들어진 조각상을 경배하고 절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만든 건물이나 조각상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1522년 종교 개혁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츠빙글리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교회가 거룩한 조각상이라도 여겨왔던 성상 파괴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츠빙글리는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를 강조하며, 교회 내의 성상과 그림, 조각 등이 우상숭배를 조장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두 번째 계명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계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형상도 만들 수 없다고 한다면 인간의 예술과 문명과 과학은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계명의 해석과 적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려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라는 구절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형태의 예술 활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음악, 감동적인 그림, 웅장한 건축물은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을 묵상하게 하고 그분의 창조 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돕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술 작품들을 하나님 그 자체로 숭배하거나, 하나님을 특정한 형태로 제한하려는 시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화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이 바로 두 번째 계명의 첫 번째 구절입니다. 무엇입니까? “너를 위하여” 입니다. 이 구절에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내세우는 명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는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이유는 하나님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편한 대로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 보겠다는 인간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이런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초상화 또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나 그림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초상화나 그림은 모두 인간이 상상한 것입니다. 한때는 중국 어디서 사진작가가 찍었다는 눈 속에 박힌 예수님 모습이 굉장히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예수님 초상화는 워너 샐먼이란 사람이 1940년에 그린 그림일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린 예수님 초상화는 당시 5억 개가 넘게 팔리는 그야말로 초대박이 납니다. 예수님 초상화가 대박이 난 이후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예수님 관련 그림을 그릴 때마다 대유행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은 워너 샐먼이란 사람이 그린 초상화처럼 생겼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유행했던 예수님의 초상화는 모두 백인에다 푸른 눈에 긴 머리에 멋진 수염을 기른 당시 기준으로 대단히 잘생긴 훈남의 얼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예수님에 대한 초상이지 실제 예수님의 모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001년도에 영국 BBC 방송국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재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BBC 방송국의 의뢰로 이스라엘과 영국의 법인류학자들과 의학 연구팀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당시 1세기경 이스라엘 유대인 남자의 유골과 평준 얼굴을 토대로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BBC 방송국에서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만든 예수님의 초상화는 아마도 워너 샐먼이 그린 예수님의 초상화보다는 훨씬 더 실제 예수님의 모습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기독교인들이나 교회는 이 그림을 예수님의 초상화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초상화가 예수님의 초상화라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인들은 왜 BBC 방송국이 전문가를 동원하여 만든 예수님의 초상화를 거부하였을까요? 아마도 BBC 방송국에서 재현한 예수님의 초상화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대다수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못생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신앙에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보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 내가 믿고 싶은 예수님, 내가 바라는 예수님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은 잘생겨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은 멋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무조건 내 편이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이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켜주고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킨 예수님을 원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내 '신앙 코드'와 내 '신앙 스타일'을 만족시켜주는 설교와 교회를 원하며 이것을 충족시켜주는 교회와 목사를 찾아다닙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만연한 신앙 풍조입니다. 말만 신앙 풍조이지 세상 풍조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풍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동시에 성경은 천하 만물이 모두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신10:14]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며 동시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의 처지에서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믿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저기 마음대로 나타나도록 하지 말고, 한 자리에 모셔 두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훨씬 쉬운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하나님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지 마시고 여기 한 자리에 얌전히 계세요. 그러면 제가 수시로 와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길게요”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지닌 존재이기에 지극히 감각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대상을 자기의 신으로 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대상은 모두 사람이 만들어 낸 가짜 신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가짜 신 우상은 인간 욕망의 투영이며 산물이지 결코 인간이 믿고 따라야 할 신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신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자유를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모양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인간이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눈에 보이는 형식이나 예식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형상화하려는 유혹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혹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공이나 물질적인 풍요를 하나님처럼 숭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특정한 틀 안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때로는 불안하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바라기는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예배하는 참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분으로 계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거두어 주옵소서. 사람이 만든 형상보다,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게 하시고, 어떤 형식이나 장소에 제한되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