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앙, 믿음입니까? 미신입니까?
출애굽기 20:4-5a, 신명기 4:15-18
십계명 강해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신앙 믿음입니까? 미신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은 얼핏 읽으면 대단히 비슷한 계명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첫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계명입니다.
반면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라는 두 번째 계명은 보이지 않는 분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화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멋대로 규정하거나 제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제멋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함부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이 만든 가짜 신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전락시키고는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 형식을 갖추었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미신일 뿐입니다.
우상을 믿는 미신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우상을 믿는 미신은 어떤 것입니까? 우상을 믿는 미신은 자기의 정성이나 제물로 자신이 믿는 우상을 어르고 달래려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자신의 정성이나 제물로 자신이 믿는 우상의 뜻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바뀌지 않고 자신이 믿는 우상을 바꿔서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루거나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람이 함부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과 계획보다 훨씬 더 유익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하나님을 바꾸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내가 바뀌는 것, 내 뜻을 이루려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려고 하는 것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과 간구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어긋나지 않을 때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저 인간 자빠져서 코가 깨지게 해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슬롯머신 붙잡고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당첨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크게 패하며 무려 4천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군사가 죽습니다. 첫 번째 전투에서 대패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 블레셋을 물릴 칠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무엇입니까? 실로라는 지역에 모셔 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기로 한 것입니다.
삼상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언약궤(법궤)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두 돌판을 보관하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든 것입니다. 물론 십계명 두 돌판을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마치 하나님처럼 대대손손 소중하게 여기라는 의미에서 언약궤를 만들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장로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가져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다 놓으면 그것이 힘을 발휘해서 전쟁에서 이기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보다는 눈에 보이는 언약궤를 가져다 놓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제사장들이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사기충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얼마나 사기충천하여 소리를 외쳤던지 땅이 울릴 정도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삼상4: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그 소리가 얼마나 컸으면 블레셋 군사들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울리는 큰 소리를 듣고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궤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궤를 전쟁터에 가져왔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 군대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두려움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신이 이집트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이집트를 물리친 이스라엘의 신이 이스라엘을 도와준다면 자신들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블레셋 군대는 히브리인들의 종이 될 수 없다며 목숨을 걸고 대장부처럼 전쟁에 임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군대는 자신들이 앞세운 여호와의 궤만 믿고는 설렁설렁 전쟁에 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궤를 앞세웠지만 결국, 이스라엘의 엄청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없이 치렀던 첫 번째 전투에서는 이스라엘 군사 4천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궤를 앞세우고 치른 전투에서는 무려 이스라엘의 보병 3만 명이 죽었습니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사건은 이스라엘 군대가 앞세우고 나간 언약궤를 블레셋 군대에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우상을 섬기는 블레셋 이방 민족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스라엘 군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언약궤를 믿고 의지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자신들이 만든 언약궤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다 오기만 하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만든 언약궤에는 저들이 기대하였던 마술적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앞세웠던 언약궤를 뺏어간 블레셋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로부터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 군대가 자신들이 뺏은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상 앞에 전리품으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함입니다.
삼상5: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져서는 얼굴이 땅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여긴 사람들이 넘어진 다곤을 세워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또다시 신전에 가보니 다곤의 머리와 두 팔이 잘라져 나가고 몸뚱이만 여호와의 궤 앞에 전날과 똑같이 엎드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정말 여호와의 궤에는 신비한 힘이나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궤 자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상자에 불과합니다. 만약 여호와의 궤에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갔을 때도 신비한 능력으로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언약궤 안에 모셔 둔 십계명을 적은 두 돌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이라고 해서 거기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나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람이 새겨서 만든 돌판일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신 것이지 언약궤나 그 안에 있던 십계명 돌판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십계명 두 돌판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모세가 손수 새긴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명령으로 만든 물건이라도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이나 능력도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만들지 말라고 한 것에 어떻게 신성한 힘이나 능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성경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기록된 말씀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원전 11세기에 일어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무려 3천 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형태나 방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고 미신처럼 믿는 일들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교육감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선거 운동을 시작하며 교육감 후보로 나온 한 후보를 위한 선거 캠프 출정식 예배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방식의 예배는 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날 선거 캠프 출정식 예배에 그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여러 목사가 참석하여 이 사람의 선거 승리를 위해 예배를 드리고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력을 보면 목사들이 함부로 안수기도해서도 안 되고, 안수기도해준다고 해서 넙죽 안수기도를 받아도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2023년도 한국 공무원 불자연합회 회장의 이력을 가진 불교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불교계의 내로라하는 스님들이 모여서 이분의 회장 취임 법회를 대대적으로 열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 사람이 2023년 불자연합회 회장 임기를 마치고 나서 2024년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목사들은 자신들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교육감으로 세우려고 했고, 선거에 출마한 사람은 비록 불교 신자이지만 개신교의 도움을 얻어 교육감에 당선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거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유명한 목사들이 예배를 드리고 안수기도까지 했으니까 당선됐을까요? 아니요. 다른 분이 당선되었습니다. 목사들과 출마자 모두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예배를 이용하고 교인들을 이용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이용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런 식의 예배나 기도가 두 번째 계명을 어기는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것이며 미신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신으로 스스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사람들이 원하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규정하고 제한하는 순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만들어 낸 하나님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분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을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제멋대로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미신처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보이지 않는 분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우상을 믿는 미신과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상을 믿는 미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면 예배나 기도를 내 뜻과 소원을 이루는 수단이나 방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하나님을 바꾸고 변화시키려는 미신이 아니라 나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믿음이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보이지 않으나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하신 주신의 크신 뜻을 우리의 작은 욕심으로 가두지 않게 하옵소서.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미신적 신앙으로 머물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끊임없이 깨우쳐 주시고 가르쳐 주옵소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의 욕심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시고 영원한 계획에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